시편 113편 - 우리의 삶을 소풍처럼 만드시는 분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편113:3
서론: 찬양의 이유를 찾아서 – 시편 113편의 초대
시편 113편은 성경의 찬양 시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시편은 '할렐 시편'의 시작을 알리는 곡으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식사 때 불렀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이 시를 찬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시편 113편이 단순한 찬양을 넘어, 구원 역사의 핵심을 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나아가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라고 선언하며,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편의 말씀을 통해,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면서도 우리에게 친히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성품들을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분의 겸손과 사랑, 그리고 자비로운 통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소풍처럼 설레는' 여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함께 탐구하며,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분을 찬양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 존귀하시나 스스로 낮추시는 하나님: 겸손과 소통의 신비
시편은 하나님이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라고 선포하며, 그분과 같은 분은 아무도 없다고 수사적으로 질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비할 데 없는 위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분의 영광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며, 그 어떤 존재도 그분과 비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편은 지극히 높으신 그분께서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스스로 낮추심'은 단순히 내려다보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이는 깊이 관찰하고, 분별하며, 심사숙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위에 높으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낮추어 천지를 살피신다는 것은 그분의 위대함과 겸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왜 스스로를 낮추실까요? 이는 단순히 능력이 있으셔서가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직 초월적인 존재로만 계셨다면, 인간은 그분을 알 수도, 진정으로 찬양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낮아지심'은 인간이 그분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랑의 행위이자 관계의 전제 조건입니다. 이는 진정한 위대함이 고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데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낮아지심은 장차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표합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우리와 소통하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기쁨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적극적인 자기 계시와 인간 조건 속으로의 들어오심, 즉 성육신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살피신다'는 것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선 '심사숙고하고 분별하는' 행위이며 , 이 궁극적인 소통의 방식은 바로 '성육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단순히 피조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삶의 현장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함께하시고 싶어 하는 깊은 열망과 '즐거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일방적인 명령이 아닌, 관계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겸손한 소통 방식은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가 인도에서 집회를 하던 중, 한 교인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시골 마을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마을은 진흙으로 뒤덮인 열악한 시골 마을이었지만, 스토트 목사는 그곳을 찾아가 인도 전통 방식대로 무릎을 꿇고 절하며 그 어머니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 일화처럼, 진정한 소통은 상대방의 눈높이까지 내려가는 겸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John Calvin)은 시편 113편이 "하나님의 섭리가 그분을 찬양할 근거를 제공한다"고 강조하며, "그분의 탁월하심이 하늘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기꺼이 세상을 굽어보신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시고 돌보시는 분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2. 위엄으로 통치하시나 억압하지 않으시는 사랑
하나님은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신 분이지만, 그분의 통치는 억압이 아닌 자비와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시편은 그분께서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라고 말씀합니다. '먼지 더미'와 '거름 더미'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천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힘으로 억압하거나 약자를 소외시키는 것과 달리, 하나님의 위엄은 역설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들어 올림으로써'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낮은 자들을 일으켜 세워 사회의 중요한 위치인 '지도자들'과 함께 앉히십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구제를 넘어선 존재론적 존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거름 더미'와 같은 비참한 곳에서 사람을 일으켜 '왕자들과 함께 앉히는' 행위는 단순한 자비가 아니라, 기존의 불의한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정의로운 질서를 세우는 강력한 통치 행위입니다. 이는 억압이 아닌 '회복'과 '세움'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또한 시편은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라고 하여, 고대 사회에서 큰 수치와 고통이었던 불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으키심은 그분의 통치가 억압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가 한자리에 앉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높낮이 때문에 상처받을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삶은 특정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통치적 개념'입니다.
3. 모든 인간을 언약의 파트너로 초대하시는 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언약적 교제'를 맺기를 원하시는 관계적인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언약 없이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신다'고 할 정도로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핵심 원리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언약의 파트너'로 대우하려는 하나님의 깊은 열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로봇이나 기계가 아닌, 생각하고 결정하며 구원 사역에 '동참'하도록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동의'를 구하실까요? 이는 그분이 일방적인 군주가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본질적으로 '쌍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며 ,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협력자' 이자 '대등한 상대' 로 여기시는 존중의 표현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저 기능적인 부여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과 충성을 기대하는 관계적 주권의 발현입니다. 강제된 순종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택'과 '충성' 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복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회복 사역에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세상에 전하는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일에 참여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4. 인생을 소풍처럼, 설렘으로 향하는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
시편 113편은 가난하고 궁핍하며 자녀가 없는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며, 이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분을 찾을 때,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찬양은 단순히 기분 좋은 노래가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믿고 맡기는 행위이자, 주님을 완전히 신뢰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괴로울 때, 화가 날 때, 응답이 더딜 때, 억울함을 당할 때에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인생을 소풍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바람은, 고난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변혁적 임재를 경험하며 궁극적인 승리를 신뢰하는 '찬양의 삶'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소풍'은 즐거움과 기대를 담지만, 인생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난 속에서 '설렘'을 가질 수 있을까요? 찬양은 단순히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적극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뢰를 통해 우리는 '정해진 운명'이 없으며 , 하나님이 우리 삶에 '높음'을 채워주실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즉, '소풍 같은 삶'은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찬양함으로써 얻는 내면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설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 시민이 되었음을 기억하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독려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귀한 반응이자 사명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찬양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영원토록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삶의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성취될 것을 믿으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론: 찬양으로 응답하는 우리의 삶
시편 113편은 우리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고, 가장 낮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를 존귀한 언약의 파트너로 초대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분은 위엄으로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결코 억압하지 않으시며, 언제나 우리의 동의를 구하시고, 모든 사람이 인생을 소풍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응답은 '찬양'입니다. 찬양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를 넘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곳은 곧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찬양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소망과 기쁨을 경험하며, 인생의 여정을 마치 '소풍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