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묵상집

시편 119편 -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 #2 (49~96절)

새벽녁 2025. 5. 17. 19:23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시편 119:53

성경에서 가장 긴 장으로 알려진 시편 119편은 마치 깊은 샘물과 같아서, 그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갈수록 새로운 의미와 위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의 글자 하나하나가 각 여덟 절씩, 총 176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 곧 토라(תּוֹרָה, 가르침, 율법)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을 노래하는 장대한 교향곡과도 같습니다. 첫 번째 연은 첫 글자 '알렙'으로 시작하는 여덟 절, 두 번째 연은 두 번째 글자 '베트'로 시작하는 여덟 절, 이런 식으로 그 구조부터 경이로움을 자아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시편을 읽으며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고 느껴 쉽게 지나치기도 하지만, 이 시편은 반복되는 듯한 구절 속에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깊은 지혜와 위로를 담고 있는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이 시편의 구절들이 때로는 지친 마음에 작은 힘과 소망의 빛을 건네주기도 합니다.

고난 중에 만난 말씀의 위로 (시편 119:49-56)

시편 119편 49절에서 56절에는 이러한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시 119:49-56)

이 고백은 "주님의 법도를 지킨 것이 나의 힘입니다"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인생의 광야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준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요?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 周作)는 그의 작품 속에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보다는 고통받는 이들 곁을 묵묵히 지키며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기적은 없었지만, 그 따뜻한 동행을 통해 사람들은 회복의 경험을 합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50절에서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고, 때로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이 왔을까?"라는 자책에 빠지게 합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정죄의 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있다면 그 고통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떠나지 않은 참된 벗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과 '나'의 깊은 관계를 발견합니다. "말씀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동시에 "나 또한 말씀을 떠나지 않았다"는 능동적인 신앙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내주, 內住), 내가 말씀 안에 거하는 상호적인 사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 내면의 거처를 정하고 우리를 지키시는 신비입니다. 저명한 구약학자 발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의 저서 『이스라엘의 신앙』(Theology of the Old Testament)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다바르, דָּבָר)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다바르'는 사건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기억의 힘, 회복의 능력 (시편 119:49, 52, 55)

시인은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49절),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52절),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55절)라고 반복해서 '기억'을 언급합니다. 영어 단어 'remember'는 're-member', 즉 '다시(re) 구성원(member)이 되다'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잊고 지냈던 가족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금 소속되는 것,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것, 이것이 기억의 힘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떠나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는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라며 아버지 집을 '기억'합니다. 성경은 이때 그가 "이에 스스로 돌이켜(He came to himself)"라고 기록합니다(눅 15:17). 잃어버렸던 아들의 자리, 가족의 구성원으로 '다시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은혜를 되새기는 것을 넘어, 현재의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확인시키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공급받는 과정입니다. 유대교에서 '자카르'(זָכַר, 기억하다)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현재화하여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지는 중요한 신앙 행위입니다.

의로운 분노와 예언자적 외침 (시편 119:53)

그러나 시인은 위로와 소망만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53절에서 그는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라고 외칩니다. 우리 시대는 종종 이러한 '거룩한 분노'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개인의 이익이 침해당하면 쉽게 분노하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히고 주의 법도가 무시당하는 현실에는 무감각해지곤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일컫는 히브리어 '나비'(נָבִי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프로페테스'(προφήτης)로 번역되는데, '프로'(대신하여)와 '페테스'(말하는 자)의 합성어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마음, 특히 불의한 세상과 사랑 없는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말씀이 자신 속에서 불타는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렘 20:9).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은 그의 명저 『예언자들』(The Prophets)에서 예언자적 감수성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이러한 거룩한 분노를 조금은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준 (시편 119:57-64)

다음으로 57절에서 64절을 보면,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라고 선포합니다. '분깃'(חֵלֶק, 헤레크)이라는 단어는 주로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기업이 없을 때,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분깃이 되어 주신다는 약속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민 18:20). 시인은 바로 이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기업이며 삶의 목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삶의 지향점이 '여호와는 나의 분깃'으로 분명해질 때, 우리의 인생은 방황을 멈추고 단순하지만 굳건해집니다. 이익과 정의의 갈림길에서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하나님을 나의 분깃으로 삼은 자는 그 선택의 기준이 명확하기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홀로 가는 것은 때로 벅차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63절)고 고백합니다. '벗'(友)이라는 한자는 오른손을 함께 잡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손을 잡아주는 친구, 함께 걷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신학자들은 이를 '지원 공동체'(support communit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넘어진 우리를 책망하기보다 아픔을 알아주고 따뜻한 코코아 한 잔처럼 위로하며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공동체, 이것이 바로 서로를 아끼는 이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저서 『성도의 공동생활』(Life Together)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됨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강력한 힘을 지니는지 강조합니다.

고난의 유익, 겸손의 가르침 (시편 119:65-72)

시인은 67절과 71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고난이 때로는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도리깨질이 콩깍지를 벗겨내고 알곡을 드러내듯, 고난은 우리 삶의 불필요한 껍데기들을 벗겨내고 가장 빛나는 핵심, 즉 겸손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드러나게 합니다.

늘 건강하기만 한 사람은 아픈 이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넘어짐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게 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많은 고난을 겪어야 사람이 겸손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은 피하고 싶은 불청객이지만, 그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 또한 없었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반면, 고난을 통해 배우지 못한 "교만한 자들의 마음은 기름 같이 둔하여졌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70절). '마음이 기름 같이 둔하다'는 것은 분별력을 잃고 무디어졌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때로 우리 마음의 밭을 갈아엎어 부드럽게 하고,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연기 속의 가죽부대처럼, 그러나 잊지 않는 말씀 (시편 119:81-88)

시인의 고통은 83절에서 "내가 연기 속에 둔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라는 처절한 묘사로 절정에 이릅니다. 연기 속에 그을린 가죽부대(נֹאד בְּקִיטוֹר, 노드 베키토르)는 바싹 마르고 쭈그러들어 쓸모없게 된 상태를 그립니다. 인생이 그처럼 고달프고, 교만한 자들이 파놓은 웅덩이에 빠져 거의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시인은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나이다"(87절)라고 외칩니다. 이는 고난의 극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신앙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영원히 굳건한 말씀, 흔들리는 세상 속의 닻 (시편 119:89-96)

세상의 가치와 법도는 수시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내면 또한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89-91절).

인간의 마음(人心)은 위태롭고 변화무쌍하지만, 하늘과 땅에 굳게 선 하나님의 법도(道心)는 영원불변합니다. 만물의 질서 속에 깃든 하나님의 법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영원한 그 말씀을 붙잡고 든든히 서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C.S. 루이스(C.S. Lewis)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보편적인 도덕률, 즉 자연법의 존재를 주장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는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기준이 됩니다. 오늘날 기후 변화를 보고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다고 다들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질서를 보존하기 윈한 자연의 작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지 모릅니다.

맺음말: 말씀의 빛을 따라 걷는 삶

시편 119편을 찬찬히 읽다 보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이에게 주어지는 깊은 위로와 잔잔한 힘, 그리고 꺼지지 않는 소망의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길이 보이지 않고 인생이 고단하게 느껴질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 내면을 비추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등불일 것입니다. 그 빛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변함없는 평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연기 속의 가죽부대처럼 우리의 삶이 초라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순간 주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고 그분의 말씀을 가만히 되새길 때, 우리는 다시금 소중한 존재로서 그분의 따뜻한 품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시편이 건네는 희망의 속삭임이 오늘, 우리 곁에 머물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