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묵상집

시편 119편 - 토라의 가르침

새벽녁 2025. 5. 17. 16:34

말의 힘, 삶의 기초: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넘실댑니다. 말은 본래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지요. 마치 음악에서 음과 음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이음줄(slur)’처럼 말입니다. 이음줄이 없다면 음악은 뚝뚝 끊어져 딱딱하게 들릴 거예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주기 위해 생겨났죠.

하지만 이 아름다운 연결고리인 말이 때로는 그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선한 가면을 쓰고 다가오는 악한 의도의 말들, 생각만 해도 오싹하지 않나요? 우리 주변에는 알면서도 속아주는, 혹은 교묘하게 오용되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식당에서 누군가 "이거 진짜 맛있어요!"라고 외칠 때, 그 말에는 정말 감탄만 담겨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숨어있을까요? 부모님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고 하실 때, 물론 자식을 위한 진심 어린 마음이 크겠지만, 때로는 부모님 자신의 바람이나 불안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말 역시 때로는 자유를 주는 대신 상대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기도 하죠.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과 자유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했죠. 구속하는 사랑은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종교적인 맥락에서도 이런 오용은 비일비재합니다. 진심으로 축복을 빌어주는 "축복합니다"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합리적인 해결 대신 불합리한 방식을 강요하며 "은혜롭게 해결합시다"라고 말하는 상황은 곤란합니다. 가장 강력하게 오용될 수 있는 말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일 겁니다. 이 말은 때로 모든 토론을 차단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권위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참다운 말'에 대한 공부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그분의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속 지혜의 샘, 토라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시편 119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무려 176절에 달하죠. 이 장대한 시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토라(Torah)'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흔히 '모세오경'으로 알려진 토라는 단순히 다섯 권의 책을 넘어 '가르침'이라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를 향한 가르침일까요?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말씀이었죠.

시편에는 다양한 노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토라'를 노래하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시편 전체의 문을 여는 시편 1편, 그리고 시편 19편,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119편이 대표적입니다. 이 시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 즉 토라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네 가지 도구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분별할 수 있을까요? 신학자들은 보통 세 종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of God)', 바로 성경입니다. 둘째는 '선포된 말씀', 즉 설교와 같이 대언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육신이 되신 말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우리의 신앙은 이 세 가지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포된 말씀은 때로 기록된 말씀의 본래 맥락에서 벗어나 왜곡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 구절이 화자의 의도를 강화하기 위한 권위로만 사용될 때, 그야말로 오용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18세기 영국의 신학자이자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성경(Scripture)', '전통(Tradition)', '체험(Experience)', 그리고 '이성(Reason)'입니다. 이 네 가지를 '웨슬리안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부르죠.

  • 성경은 가장 기본적인 권위입니다.
  • 전통은 오랜 시간 교회가 쌓아온 교리와 해석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교리(라틴어 dogma의 어원은 '근사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의 신앙 경험이 왜곡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체험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만남을 통해 얻는 깨달음입니다. 체험 없는 신앙은 '그들이 말하기를' 식의 간접적인 지식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 이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판단력과 분별의 능력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건강하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죠. 예를 들어 전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개인의 체험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에는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을 통해 경험되고 문자화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전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를 잃지 않는 이유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때문인 것처럼, 성경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삶의 기초를 세우는 지혜, 토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즉 토라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과 삶의 기초가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살라'는 생명의 명령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셨던 고(故) 신영복 선생님의 글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랜 수감 생활을 하셨던 선생님은 감옥에서 만난 한 목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적으셨죠. 보통 사람들은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김 목수님은 언제나 집을 짓는 순서대로, 즉 기초부터 차근차근 그려나갔다고 합니다. 머리와 관념으로 사는 사람은 위에서부터 생각하지만, 몸으로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은 가장 기초부터 쌓아 올리는 법을 안다는 것이죠. 이 일화는 우리 인생에서도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토라가 바로 우리 인생의 집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넘어선 가르침, 토라

시편 1편 3절은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그'는 밤낮으로 주님의 율법, 즉 토라를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9편은 여호와의 도(토라)가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시편 119편 역시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율법과 복음이 대조되는 것을 보았고,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죠. 이는 '토라'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 '노모스(nomos)'로 번역되면서 '법규, 규정'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라의 본래 의미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든든하게 세워주는 기초가 됩니다.

토라에는 두 가지 핵심 초점이 있습니다. 마치 타원형에 두 개의 초점이 있듯이 말이죠. 첫째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Haggadah, 하가다)'입니다. 이것이 우선적인 핵심입니다. 둘째는 이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 위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방식(Halakha, 할라카)'입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먼저 있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삶의 태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토라 찬미의 교향곡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로 시작하지만, 원문에 가깝게는 "복이 있다! 그 사람은..."으로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토라를 묵상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존재 깊숙이 내면화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했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명확히 대조하며, 결국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고, 그분의 뜻을 삶으로 번역해내려는 노력, 이것이 복 있는 삶의 핵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창설자 성 베네딕토의 모습이 주로 침묵하고 묵상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입을 닫고 들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오용하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도 본래는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고(구하라),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탐구하며 애쓰라(찾으라, 두드리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시편 119편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 시는 176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 각각에 8절씩 할애하여 구성된 '알파벳 시(acrostic poem)'입니다. 예를 들어 첫 8절은 히브리어 첫 글자인 '알렙(Aleph)'으로 시작하고, 그다음 8절은 두 번째 글자인 '베트(Beth)'로 시작하는 식입니다. 각 절이 해당 알파벳으로 시작되도록 정교하게 짜인 것이죠 (약간의 예외는 있습니다). 이는 암송을 돕고, 각 알파벳에 담긴 의미를 통해 토라의 다양한 측면을 노래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이 장대한 시는 한 사람의 천재적인 영감으로 단숨에 쓰인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공동체의 '집단 지성'이 오랜 시간 다듬고 수정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쉬운 점은 번역 과정에서 히브리어 알파벳이 주는 독특한 리듬과 구조미를 온전히 살리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토라, 자유를 향한 길

그렇다면 시편 119편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바로 토라에 기반한 삶이 진정으로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며,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라를 기초로 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삶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시편 119편 45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 (새번역: 내가 주님의 법도를 열심히 지켰으니, 이제는 넓고 확 트인 길을 거닐겠습니다)."

이 구절 속에 시편 119편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자유인이 되게 합니다.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은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이라고 노래하며 자유를 향한 삶을 그렸습니다. 또한 고대 중국 철학자 장자(莊子)의 사상을 빌려 표현하자면, 오직 한 분(하나님, 혹은 道)에게만 내 삶을 온전히 맡길 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면, 세상의 다른 것들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시편 119편은 토라,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인가'임을 보여줍니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수많은 구속에 얽매여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시는 영혼의 자유를 향한 길을 안내하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디딜 때, 우리는 비로소 시냇가에 심겨 철따라 열매 맺는 나무처럼 풍성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