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9편 - 삶의 진짜 가치를 찾아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나 우둔한 자도 모두 다 죽는 것을! 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
시편49편10절
1. 삶의 진짜 가치를 찾아서: 시편 49편의 지혜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때로는 가진 것이 사라졌을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답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합니다. 마치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 『영혼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말이죠. 어린 시절,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이웃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해, 포도를 수확해 말리던 중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아이들은 수업도 잊은 채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포도들은 빗물에 다 떠내려가 버렸죠. 한 해 농사를 망친 것입니다. 어린 카잔차키스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제 우리는 어떡하죠?"라고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답합니다. "어떻게 하긴, 우리는 여기 있잖니."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에도, '나'라는 존재 자체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은 이러한 삶의 근원적인 가치와 허망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시편 49편을 통해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2. 모두 귀 기울여 들으라: 시편 49편의 초대
시편 49편은 마치 온 세상을 향해 외치는 듯 시작합니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이 시는 특정 계층이나 집단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야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지혜'와 '명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매우 깊고 심오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지혜'(호크마)와 '명철'(비나)이 복수 형태로 사용된 것은 바로 그 깊이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마치 수수께끼나 비유처럼, 일상적인 생각의 틀을 깨고 더 깊은 통찰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많은 학자들은 시편 49편의 해석이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시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부의 허무함과 영원한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지혜로운 말씀으로 세상의 허망함에 대해 선포하며, 특히 부유함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려 합니다. 어떤 학자는 시편 49편의 시대적 배경을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회적 격차가 컸던 시기로 보기도 하며, 시편 기자가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며 부유한 자들의 억압을 비판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려 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3. 재물이 구원할 수 없는 것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지혜는 무엇일까요? 바로 재물의 허망함입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이니라." (시편 49:6-8)
아무리 많은 돈과 재물을 가졌다 한들, 그것으로 죽음 앞에서 형제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도 없습니다.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재물은 다른 사람에게 남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집과 땅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며 재산을 모으는 데 힘쓰지만, 시편 기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하며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12) 죽음 앞에서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헛된 것을 붙들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라고 시인은 지적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시편 49편은 지혜 문학의 일부로 간주되며, 코라의 아들들에게 귀속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의 탐욕이 몰락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고, 삶의 목적이 물질적 축적이 아닌 영적 성장에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이 시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시편 49편은 유대인의 애도 기간이나 특정 절기에 낭송되기도 하는데, 이는 죽음과 재물의 무상함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재물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영혼의 구속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진리는 유대인들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4. 무엇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가?
우리는 왜 이토록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될까요? 어쩌면 남과 나를 '구별 짓고' 싶은 욕망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남들이 갖지 못한 희소한 것을 소유함으로써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죠. 값비싼 명품이나 커다란 다이아몬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 예를 들어 공기나 물 같은 것은 아주 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희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흔한 것이며, 그 흔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께 더 가깝다고 시인은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현대 사회는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과정조차 돈으로 서비스를 구매하며 직접 경험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얻을 수 있는 삶의 능력들을 점점 잃어버리고, 돈에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러한 '돈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스크립트의 화자는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 몸으로 하는 일의 가치 회복: 직접 몸을 써서 무언가를 만들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장작 패기 같은 일을 맡겼을 때 아이들이 느끼는 자부심처럼, 몸을 쓰는 노동은 우리에게 성취감과 함께 삶의 본질적인 감각을 되찾아줍니다.
- 대가 없는 나눔의 기쁨: 자신의 재능이나 가진 것을 돈을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진정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내 안에 이러한 '보람'이라는 자원이 풍족해지면,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은 줄어들고 물질적인 것에 덜 얽매이게 됩니다.
탐험가 한비야 씨는 그녀의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서 "그분 앞에 서는 날 듣고 싶은 한마디의 말이 있다. 애썼다. 그 말 한마디 듣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이는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돈이나 명예가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고자 애쓰는 삶, 그것이 더 아름다운 인생 아닐까요?
두 갈래 길, 그리고 영원한 희망
시편 49편은 우리 앞에 두 가지 운명이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 어리석은 자들의 길: 자신과 자신의 재물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목자처럼 다가와 그들을 '스올'(죽은 자들의 세계, 무덤)로 이끌 것입니다. 그들이 쌓아 올린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은 사라지고 스올이 그들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 정직한 자들의 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시편 49:15)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육체적 죽음을 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계속되며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받아주신다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여러 학자들은 이 구절을 구약 성경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로 해석합니다. 특히 '영접하시리로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자신에게로 데려가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재물을 쌓아 부자가 되고 그의 집에 영광이 더해질 때,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49:16-17)
5. 무명의 백태를 벗고 세상을 보라
우리가 이러한 지혜를 깨닫지 못하면, 존귀하게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시편 49:20) 그렇다면 어떻게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구상 시인의 「말씀의 실상」이라는 시는 그 답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 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示範)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蒼蒼)한 우주, 허막(虛漠)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神靈)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
우리 영혼의 눈을 가리고 있던 '무명의 백태', 즉 어리석음과 무지가 벗겨질 때, 우리는 일상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신비와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 손가락 열 개가 있다는 사실, 길가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조차 경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살아간다면, 다이아몬드를 갖지 못한 것이 그리 큰 불행일까요? 오히려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삶이 더 멋지지 않을까요?
6. 맺으며: 내 안의 천국 만들기
결국, 소유하려는 마음은 우리 안에 지옥을 만들지만,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이웃에게 선물이 되려는 마음은 천국을 만듭니다. 시편 49편은 바로 이러한 멋진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재물이라는 허망한 집착에서 벗어나, 삶의 참된 가치와 영원한 희망을 발견하는 지혜로운 여정에 동참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버지가 말했듯, 가장 중요한 것은 절망 속에서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존재 안에서 희망을 찾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시편 49편은 물질 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재물의 축적이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썩어 없어질 재물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 시편의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 글은 김기석 목사님의 강의를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