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묵상집

시편 97편 - 삶의 선율을 다스리는 지혜

새벽녁 2025. 5. 16. 18:17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시편 97:11

 

우리네 인생길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환한 햇살 아래 기쁨의 색채가 가득하고, 때로는 먹구름 드리운 슬픔의 빛깔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채로운 감정의 점들이 모여 삶이라는 하나의 그림을 이루어내지요. 오늘 하루 내가 찍는 작은 점 하나가 내 인생 전체의 그림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마치 수학에서 점은 면적이 없지만, 그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면을 만들듯, 오늘 하루하루의 선택과 경험이 모여 우리의 인생이라는 장대한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마치 한 곡의 음악과도 같아서, 장단과 고저, 강약이 어우러져야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냅니다. 이 조화가 깨어질 때, 우리의 삶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각 음표가 제자리를 찾고, 적절한 강약과 빠르기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감동적인 음악이 탄생하듯이, 우리 인생도 그러한 조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합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흔히 '다스림'이라 하면 힘으로 누군가를 내 뜻대로 변화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다스림은 각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배치함으로써,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이끄는 지혜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각 악기의 특성을 살려 전체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듯 말입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타인에게 기쁨을 주고 평화를 이루며, 나아가 한 나라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데에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될 것입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유한 목소리를 내되, 그것이 하나의 공동체적 운명을 향해 조화롭게 나아갈 때, 그 사회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이러한 이상적인 다스림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시는 세상,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됩니다. 그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우리는 시편 97편을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 97:1-2)

이 시편이 쓰인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시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알렉산더 대왕 사후의 혼란기로 추정합니다. (참고: Artur Weiser, The Psalms: A Commentary).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세상에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그의 영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보며, 유대인들은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는 인간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시인 양성우가 암울했던 70년대 시대를 '겨울 공화국'이라 표현하며 그 질곡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했듯, 억압받던 이들에게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선포는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온 땅과 섬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그분의 통치가 억압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온 우주가 찬양하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계 5:11-14). 로마의 폭압적인 지배 아래 신음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환상은 절망을 이기고 살아갈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보좌는 찬란한 빛이 아니라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여 있을까요? 이는 어둠이 깊을수록 별빛이 더욱 빛나듯 (정진규 시인의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는 시구처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신성한 신비(mysterium tremendum)를 암시합니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그의 저서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에서 거룩함이란 인간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매혹을 느끼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Deus Revelatus)이시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숨기시는 분(Deus Absconditus)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며, 우리는 겸손히 그분의 나타내신 만큼만 알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다스림의 기초입니다. 바로 "의와 공평"(체데카 וּמִשְׁפָּט וצְדָקָה, tzedakah u-mishpat)입니다. '의'(체데카)는 단순한 공정함을 넘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약자를 돌보는 '회복적 정의'를 포함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희년(Jubilee)이나 안식년(Sabbatical year) 제도는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빚을 탕감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회복적 정의의 예입니다 (레 25장).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구약의 정의 개념이 공동체의 샬롬을 회복하는 데 있음을 강조합니다. '공평'(미쉬파트)은 법적 정의, 즉 정해진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고 시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두 가지, 회복적 정의와 법적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곳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 국회의원들이 이 두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정치에 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의 의와 공평은 때로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며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산들이 여호와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시 97:3-5). 하나님의 심판은 불의한 자들에게는 두려움이지만, 억압받고 고통받던 약자들에게는 해방과 기쁨의 소식입니다. 마치 폭압적인 권력이 무너질 때 숨죽여 살던 이들이 환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시 97:6)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상태와 관계를 의미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나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나를 다스릴 때,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고 하신 말씀처럼, 또한 우리들 '가운데'(among you) 임하는 관계적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이익을 따라 다투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섬길 때, 우리 관계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우리 삶 속에서, 그리고 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 가라는 명령입니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나를 따르라』(Nachfolge)에서 강조했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은 심판의 소식입니다.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 97:7).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 대신 들어앉은 모든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돈, 성공, 명예, 심지어 자녀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근저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상은 본질적으로 헛된 것이며, 인간을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켜 '인간 소외'를 야기합니다. 소외된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은 폭력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할 '희귀템'을 찾아 헤매며,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시온과 유다의 딸들은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합니다 (시 97:8). 미국의 소설가 존 치버(John Cheever)는 그의 소설 『팔코너』(Falconer)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는 사랑이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의미 있게 살도록 이끄는 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시 97:10)는 말씀은 중요합니다. '악'(惡)이라는 한자를 파자해보면 '버금 아'(亞)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져, '두 번째 마음' 즉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마음에 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혹은 무덤을 뜻하는 글자와 마음 심이 합쳐져 상대방에게 재앙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으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어떠한 해석이든, 악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모든 마음과 행위를 포함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의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권면처럼, 우리는 내면의 악한 생각까지도 미워하고 버려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시편 97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노래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 97:11-12).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의인과 정직한 자는 하나님께서 뿌리시는 빛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패배에도 좌절하지 않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이루어가야 할 실제입니다. 내 마음의 작은 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가정,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의와 공평, 사랑과 자비가 스며들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는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부디 시편 97편의 기쁨과 감사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