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잠언 3:11(표준 새번역)


1. 우리 인생에는 왜 이렇게 힘든 때가 많을까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전도서 3:10

우리 인생에는 정말 다양한 때가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계절로 또 나이로 나눌 수도 있고, 경험으로 나눌 수도 있죠 .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원치 않는 때도 찾아옵니다 . 예를 들어, 실패할 때, 넘어질 때, 아플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질 때처럼요 .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때도 마찬가지죠 .

이런 힘든 때가 오면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이게 왜 나한테 일어났지?" 하고요 .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누군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냥 받아들이기보다 생각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해석된 것만이 우리 삶에 통합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이러한 어려움과 노고가 우리에게 주어진 벌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이죠 .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벌이 아니라 선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힘든 일을 겪으면서 삶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하나님의 초대일 수 있습니다 . 힘든 시간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의 입장(세계관)을 알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왜 다를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전도서 3:11

우리가 바라는 시간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 내 생각에는 지금 바로 하나님이 내 삶의 문제에 개입해서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때로는 하나님이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하지만, 그 욕망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지연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전도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모든 일이 알맞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 지금 당장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설령 우리의 욕망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로운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조급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할 때,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전도자가 말합니다 . 이 말은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 동물들은 과거를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죠 . 하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과거를 현재로 가져오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하며 현재로 만듭니다 .

우리는 오늘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삶에 자신이 행한 잘못을 보도 반성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결국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반성은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타인의 존재와 내 존재를 객관적으로 돌아 볼 때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모든 비밀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다 알 수 없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면 삶의 기대와 희망이 없을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이고 우리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단어 '올람'은 '감추다'라는 뜻이 같이 있습니다. 즉, 영원은 인간에게 감춰져 있는 부분이라는 의미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일의 전체 모습을 알고 싶지만, 다 알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도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나중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것처럼 알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지금 희미하게 볼 뿐이며 , 하나님의 모든 일을 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3. 힘들 때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전도서 3:12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실연을 당하거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왜 이게 나에게 벌어졌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때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도 있어요 .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삶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 성경은 우리가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을 때에도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방식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현재 기뻐하고 선을 행하면, 나중에 가서야 우리가 왜 그런 어려움을 겪었는지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비밀 중 하나이지 않을까요? 인간은 때때로 '물음표'처럼 삶을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울음표처럼 슬픔에 잠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우리는 '느낌표'처럼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요구하고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책임(Responsibility) 이라는 단어는 '응답하다(Response)'라는 뜻과 관련이 있습니다 .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책임입니다 .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도와주는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다가와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여기에 응답하는 것이 책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적인 삶, 즉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일이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4.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요?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점도서 3:13

성경은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먹고 마시는 일이나,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그 결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때때로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일하는 것을 그저 힘든 노고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성경은 이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우리가 기뻐하며 누려야 할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수고하고, 그 수고를 통해 얻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5.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전도서 3:14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영원히 있게 하시고, 그 위에 더하거나 덜하지 않으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경외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유한한 인간인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할 수 있는지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됩니다. 경외스러운 존재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조심스럽고 겸손해지죠 . 항상 경외하는 마음속에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사물의 본질을 깊이 생각하는 것도 경외심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깨달을 때, 우리 마음을 흔들던 욕망이나 마음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욕망에 흔들리는 까닭은 삶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6.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왜 은총일까요?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1)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

전도서 3:15

성경은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저질렀던 잘못이나 상처 준 일들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세요 . 하나님은 우리가 잊어버린 것까지도 다시 찾으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이 무섭게 들릴 수도 있지만 ,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록하시고 벌주시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은 인간이 망가뜨려 놓은 것들까지도 이용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수나 욕망 때문에 잘못되었던 일들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면 새롭게 빚어지고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는 상실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성품, 즉 하나님의 불변성이 바로 우리 삶의 든든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이 창조의 리듬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시간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안에서 복을 주시고 생명과 시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이 있으신분들이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고 감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창조 리듬안에 있다는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실 때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그 위에 인생이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이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 세상의 일들은 변화가 많아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하심을 따라 흘러갑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일정한 리듬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이 리듬 속에 두셨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은 다시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심을 때와 거둘 때와 같은 창조의 리듬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은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은총은 특별한 순간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이 창조의 리듬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 자체가 은총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 모든 때를 아름답게 사는 방법입니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편113:3

서론: 찬양의 이유를 찾아서 – 시편 113편의 초대

시편 113편은 성경의 찬양 시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시편은 '할렐 시편'의 시작을 알리는 곡으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식사 때 불렀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이 시를 찬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시편 113편이 단순한 찬양을 넘어, 구원 역사의 핵심을 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나아가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라고 선언하며,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편의 말씀을 통해,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면서도 우리에게 친히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성품들을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분의 겸손과 사랑, 그리고 자비로운 통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소풍처럼 설레는' 여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함께 탐구하며,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분을 찬양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 존귀하시나 스스로 낮추시는 하나님: 겸손과 소통의 신비

시편은 하나님이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라고 선포하며, 그분과 같은 분은 아무도 없다고 수사적으로 질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비할 데 없는 위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분의 영광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며, 그 어떤 존재도 그분과 비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편은 지극히 높으신 그분께서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스스로 낮추심'은 단순히 내려다보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이는 깊이 관찰하고, 분별하며, 심사숙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위에 높으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낮추어 천지를 살피신다는 것은 그분의 위대함과 겸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왜 스스로를 낮추실까요? 이는 단순히 능력이 있으셔서가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직 초월적인 존재로만 계셨다면, 인간은 그분을 알 수도, 진정으로 찬양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낮아지심'은 인간이 그분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랑의 행위이자 관계의 전제 조건입니다. 이는 진정한 위대함이 고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데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낮아지심은 장차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표합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우리와 소통하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기쁨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적극적인 자기 계시와 인간 조건 속으로의 들어오심, 즉 성육신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살피신다'는 것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선 '심사숙고하고 분별하는' 행위이며 , 이 궁극적인 소통의 방식은 바로 '성육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단순히 피조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삶의 현장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함께하시고 싶어 하는 깊은 열망과 '즐거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일방적인 명령이 아닌, 관계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겸손한 소통 방식은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가 인도에서 집회를 하던 중, 한 교인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시골 마을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마을은 진흙으로 뒤덮인 열악한 시골 마을이었지만, 스토트 목사는 그곳을 찾아가 인도 전통 방식대로 무릎을 꿇고 절하며 그 어머니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 일화처럼, 진정한 소통은 상대방의 눈높이까지 내려가는 겸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John Calvin)은 시편 113편이 "하나님의 섭리가 그분을 찬양할 근거를 제공한다"고 강조하며, "그분의 탁월하심이 하늘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기꺼이 세상을 굽어보신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시고 돌보시는 분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2. 위엄으로 통치하시나 억압하지 않으시는 사랑

하나님은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신 분이지만, 그분의 통치는 억압이 아닌 자비와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시편은 그분께서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라고 말씀합니다. '먼지 더미'와 '거름 더미'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천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힘으로 억압하거나 약자를 소외시키는 것과 달리, 하나님의 위엄은 역설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들어 올림으로써'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낮은 자들을 일으켜 세워 사회의 중요한 위치인 '지도자들'과 함께 앉히십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구제를 넘어선 존재론적 존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거름 더미'와 같은 비참한 곳에서 사람을 일으켜 '왕자들과 함께 앉히는' 행위는 단순한 자비가 아니라, 기존의 불의한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정의로운 질서를 세우는 강력한 통치 행위입니다. 이는 억압이 아닌 '회복'과 '세움'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또한 시편은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라고 하여, 고대 사회에서 큰 수치와 고통이었던 불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으키심은 그분의 통치가 억압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가 한자리에 앉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높낮이 때문에 상처받을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삶은 특정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통치적 개념'입니다.

3. 모든 인간을 언약의 파트너로 초대하시는 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언약적 교제'를 맺기를 원하시는 관계적인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언약 없이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신다'고 할 정도로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핵심 원리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언약의 파트너'로 대우하려는 하나님의 깊은 열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로봇이나 기계가 아닌, 생각하고 결정하며 구원 사역에 '동참'하도록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동의'를 구하실까요? 이는 그분이 일방적인 군주가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본질적으로 '쌍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며 ,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협력자' 이자 '대등한 상대' 로 여기시는 존중의 표현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저 기능적인 부여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과 충성을 기대하는 관계적 주권의 발현입니다. 강제된 순종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택'과 '충성' 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복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회복 사역에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세상에 전하는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일에 참여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4. 인생을 소풍처럼, 설렘으로 향하는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

시편 113편은 가난하고 궁핍하며 자녀가 없는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며, 이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분을 찾을 때,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찬양은 단순히 기분 좋은 노래가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믿고 맡기는 행위이자, 주님을 완전히 신뢰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괴로울 때, 화가 날 때, 응답이 더딜 때, 억울함을 당할 때에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인생을 소풍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바람은, 고난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변혁적 임재를 경험하며 궁극적인 승리를 신뢰하는 '찬양의 삶'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소풍'은 즐거움과 기대를 담지만, 인생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난 속에서 '설렘'을 가질 수 있을까요? 찬양은 단순히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적극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뢰를 통해 우리는 '정해진 운명'이 없으며 , 하나님이 우리 삶에 '높음'을 채워주실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즉, '소풍 같은 삶'은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찬양함으로써 얻는 내면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설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 시민이 되었음을 기억하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독려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귀한 반응이자 사명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찬양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영원토록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삶의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성취될 것을 믿으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론: 찬양으로 응답하는 우리의 삶

시편 113편은 우리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고, 가장 낮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를 존귀한 언약의 파트너로 초대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분은 위엄으로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결코 억압하지 않으시며, 언제나 우리의 동의를 구하시고, 모든 사람이 인생을 소풍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응답은 '찬양'입니다. 찬양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를 넘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곳은 곧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찬양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소망과 기쁨을 경험하며, 인생의 여정을 마치 '소풍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주님을 믿음으로, 그의 마음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시편 112:7

1. 서론: 시편 112편 - 복된 삶의 청사진

시편 112편은 구약성서 지혜 문학의 정수 중 하나로, 시대를 초월하여 '복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시편은 단순히 이상적인 인간상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아름다운 삶을 구체적으로 가꾸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합니다. 본 글에서는 시편 112편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 즉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인간에 대한 고찰), 참된 신앙이 어떻게 아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지(아름다운 삶을 위한 신앙), 그리고 우리 곁의 의로운 존재가 개인과 공동체에 얼마나 큰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는지(의인이 지인일때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과 정신적 든든함)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시편 112편의 구조 자체도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이 시작되는 답관체 시(acrostic poem)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시편 기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즉 의인의 복된 삶과 그로 인한 축복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완전하고 포괄적으로 이루어짐을 문학적으로 강조하는 장치입니다. 마치 알파벳의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듯,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이 삶의 모든 영역에 체계적이고 온전하게 임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은 시편 112편이 제시하는 메시지의 신뢰성과 완전성을 독자에게 더욱 깊이 각인시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이 글을 통해 시편 112편에 담긴 풍성한 지혜를 발견하고, 각자의 삶과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며 적용할 수 있는 귀한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시편 112편에 비친 인간의 모습: 연약함과 의로움 사이에서

시편 112편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1절)로 묘사하며, 이러한 경외와 순종을 통해 의로움에 이를 수 있는 존재로 그립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한 가능성이자 잠재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경외)와 그분의 뜻에 대한 기쁨(계명을 즐거워함)을 통해 인간은 '복된 자', 즉 '의인'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 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동시에 그분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존재로 그려지며, 이는 수동적인 복종을 넘어선 능동적인 선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시편은 의인의 삶이 결코 고난과 무관하지 않음을 현실적으로 인정합니다. 의인조차도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4절)라는 표현처럼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기도 하며,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7절)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기치 않은 도전과 역경에 직면합니다. 여기서 '흑암'과 '흉한 소식'은 질병, 경제적 궁핍, 사회적 재난, 인간관계의 갈등 등 우리가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온갖 고난과 환난을 포괄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현실을 외면한 값싼 낙관론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의로움이 곧 고난의 면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간 실존의 정직한 단면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시편 112편이 말하는 인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의를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고귀한 잠재력을 지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라도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C.S. 루이스(C.S. Lewis)는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가장 닮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충만과 필요, 주권과 겸손, 의와 참회, 무한한 능력과 도움을 구하는 외침보다 더 닮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시편 112편이 보여주는 인간의 이중적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면서도 동시에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한 의에 이를 수 없는 연약함을 지닌 존재라는 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끊임없이 회개하고 순종하며 의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지속적인 영적 여정이 요구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동의를 넘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의지적인 결단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이 수반됩니다. 아름다운 삶은 이러한 경외심에 기반한 의식적인 삶의 태도를 통해 가꾸어 나가는 것이지, 저절로 주어지는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시편 112편의 의인은 고난이 없을 때가 아니라, 바로 그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자세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집니다.

3.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믿음: 시편 112편의 가르침

시편 112편이 그리는 '아름다운 삶'은 세상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나 순간적인 쾌락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깊고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된 삶'(blessed life)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지 물질적 풍요나 세속적 성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평강, 건강한 관계에서 오는 풍요로움, 그리고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데서 오는 전인격적인 만족감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개념입니다. 시편은 이러한 복된 삶이 후손의 강성함(2절), 가정의 부요와 의로움(3절), 어둠 속에서 만나는 빛과 같은 희망(4절),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기억됨(6절), 그리고 궁극적인 명예(9절) 등으로 나타난다고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건강, 성공, 재물 등이 복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시편 112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삶의 가장 큰 기쁨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본질적인 복이라고 역설합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알아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소유하게 하소서... 이곳에서 주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자라나게 하시고, 저곳에서 온전케 하소서. 이곳에서 주님을 향한 저의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곳에서 무르익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곳에서의 저의 기쁨이 소망 안에서 커지고, 저곳에서의 결실 안에서 온전케 되게 하소서."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안에서 참된 기쁨을 찾는 삶의 자세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동력은 바로 '믿음'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체적인 태도와 행동으로 발현되는 능동적인 실천입니다. 첫째, 모든 신앙의 기초이자 출발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1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에 순복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둘째, 그분의 말씀을 "크게 즐거워하는 것"(1절)입니다. 이는 성경 읽기와 묵상,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을 사모하며 그 안에서 삶의 지혜와 기쁨을 찾는 능동적인 자세를 포함합니다. 셋째, 이러한 내적 신앙은 반드시 외적인 행동으로 이어져, "어질고 자비하며 의로운"(4절) 성품을 통해 타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고"(5절),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나누어주는"(9절)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의로움은 규칙에 얽매인 경직된 삶이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 기쁨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며 관대함을 실천하는 사람 중심적인 삶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전인격적이고 다각적인 헌신, 즉 경외와 순종, 자비와 정의의 실천이 어우러진 총체적인 믿음은 우리에게 귀한 내적 열매를 선물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며"(6절),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고"(7절),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8절)는 말씀처럼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견고함과 깊은 평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늘의 지혜를 얻어 어떤 흉한 소식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 하나님을 굳건히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역경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인격은 편안함과 고요함 속에서 발전할 수 없다. 시련과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만 영혼이 강해지고, 야망이 고취되며,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며, 역경을 통한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시편 112편은 이처럼 내적인 신실함(하나님 경외와 말씀 사랑)이 외적인 선한 행동(자비와 정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행동은 다시 내면의 견고함과 평강을 강화하며, 궁극적으로 개인과 가정을 넘어 사회와 다음 세대에까지 미치는 다층적인 복(후손, 재물, 명예, 영원한 의)으로 확장되는 아름다운 선순환 구조를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내적 상태와 외적 실천이 조화롭게 상호작용하며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의 실천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어디서든 불의는 모든 곳의 정의에 대한 위협이다"라고 강조한 것처럼,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건강성과 연결됩니다.

다음은 시편 112편에 나타난 의인의 주요 특징과 그에 따른 축복을 정리한 표입니다.

특징
관련 구절
삶의 열매/축복
신앙적 의미
여호와를 경외함
1절
복이 있도다
모든 축복의 근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설정
계명을 크게 즐거워함
1절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신앙의 유산 계승, 하나님의 뜻을 삶의 기쁨으로 삼음
정직함
4절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남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 하나님의 인도하심 체험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움
4절
(내적 성품 자체가 축복)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
은혜를 베풀며 꾸어줌
5절
그 일이 잘 되나니
청지기적 삶, 나눔을 통해 더 큰 풍요를 경험
일을 정의로 행함
5절
(공의로운 질서 확립)
사회적 신뢰 구축,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에 드러냄
흉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음
7절
마음이 굳게 정해짐, 견고함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 유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줌
9절
그의 의가 영원히 있고 그의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 영원한 가치와 명예를 얻음

이 표는 시편 112편의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우리 삶에서 어떤 신앙의 덕목을 추구해야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지 구체적인 지침을 얻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4. 의로운 벗의 빛나는 영향력: 마음의 기둥, 삶의 위로

시편 112편이 묘사하는 의인은 개인의 복락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에 강력하고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마치 등대가 어두운 밤바다를 비추듯, 의로운 한 사람의 삶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선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특히 우리가 삶의 예기치 않은 어려움과 혼란에 직면했을 때, 우리 곁의 의로운 지인(知人)은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등불처럼, 세찬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배의 닻처럼, 그리고 무너질 듯 위태로운 마음을 굳건히 붙들어주는 기둥처럼 다가옵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는 "공동체의 복됨과 개인의 복됨은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다. 왜냐하면 공동체란 다름 아닌 개인들의 조화로운 집합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의로운 개인의 삶이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의 의로운 영향력은 단순한 개인적 경건을 넘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동심원처럼 가족과 이웃, 그리고 공동체 전체로 확장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든든함'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역경과 환난 앞에서도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하며"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7-8절)고 선언하는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안정감을 줍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 의인의 평강은 부정적인 감정의 확산을 막고, 오히려 주변에 빛과 소금의 효력을 발하여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전파합니다. 둘째,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4절)라는 말씀처럼,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정직함, 그리고 진실함은 혼란스럽고 부패한 세상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빛'이 되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셋째, 그들이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고"(5절)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9절) 자비롭고 공의로운 행동은 깨어진 관계와 불신으로 가득한 사회에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신뢰를 회복시키는 촉매제가 됩니다. 여기서 '꾸어준다'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 도움을 넘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며 상담과 가르침, 그리고 실제적인 도움을 통해 그들의 삶을 지지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대함과 공정한 일 처리는 이웃과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사회적 신뢰와 안정에 기여합니다.

이처럼 의로운 한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메시지가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과 지지를 제공하며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들의 삶의 일관성(정직, 공의)에서 오는 신뢰감, 역경 앞에서의 견고함(두려워하지 않음)에서 오는 안정감, 타인을 향한 적극적 선행(자비, 구제)에서 오는 실제적 도움과 소망,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오는 영적인 힘이 결합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정신적 지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말뿐만이 아닌 삶 자체, 즉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말씀의 능력을 증거하는 강력한 '존재론적 증거'가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강을 잃지 않고,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갈망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이 주는 가장 깊은 차원의 '정신적 든든함'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로운 영향력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의 의가 영원히 있고"(3절, 9절)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6절)라는 말씀처럼,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귀한 신앙의 유산이 됩니다. 작가 피터 스트로플(Peter Strople)은 "유산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안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시편 112편의 의인이 남기는 영향력과 그 정신적 유산의 가치를 잘 보여줍니다. 부모의 의로운 삶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해 자녀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그 의로운 영향력은 세대를 거듭하며 아름답게 계승되는 것입니다.

5. 결론: 시편 112편의 지혜를 오늘 우리 삶에 담다

시편 112편은 우리에게 '복된 자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 삶이 어떻게 개인의 행복과 안녕을 넘어 주변 공동체에까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명확하고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삶의 가장 큰 기쁨으로 삼으며, 일상 속에서 자비와 정의를 꾸준히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역시 시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흑암"과 "흉한 소식"이 가득한 도전적인 현실입니다. 경제적 불안, 사회적 갈등, 개인적 고난 등 다양한 어려움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12편의 의인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그분의 변치 않는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내면의 깊은 평강을 누리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만연하여 부도덕과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세상의 목소리가 클수록, 믿는 자들은 더욱더 자신의 성품을 갈고 닦아 의로운 삶의 가치를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순간의 변덕에 좌우되지 말고 옳은 것을 행하고 감행하라. 생각의 유희 속이 아니라 오직 행동 속에서만 자유가 있다. 주저 말고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라. 하나님의 명령과 너의 믿음이 너를 지탱해 줄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앎을 넘어선 실천적 책임과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시편 112편의 의로운 삶 또한 이러한 책임감 있는 행동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이 시편에 담긴 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비록 작을지라도 '의인'으로 살아가기를 힘쓸 때,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값을 매길 수 없는 '정신적 든든함'을 선물하는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삶이 다른 이들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은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퍼져나가, 공동체 전체를 더욱 건강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시편 112편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바로 그러한 복되고 영향력 있는 삶으로 힘차게 초대하고 있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시편 112편이 묘사하는 완전한 의인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셨고, 그분의 계명을 완벽하게 즐거워하셨으며, 흑암 속의 참된 빛이 되셨고,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어주시며 빈궁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재물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편 112편을 읽을 때, 우리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룩한 의의 기준을 발견함과 동시에, 바로 그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 진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시편 112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근원적이고도 궁극적인 '정신적 든든함'의 원천일 것입니다.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인생의 위대한 쓰임은 그것보다 더 오래 지속될 무언가를 위해 인생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112편이 제시하는 의인의 삶은 바로 그러한 영원한 유산을 남기는 삶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소망은 그 유산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이 소망 안에서, 우리 모두 시편 112편의 지혜를 따라 아름다운 믿음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시편 111:4

1.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시편 111편 4절은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기억'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기억은 마치 부단히 관리하지 않으면 흐릿해지는 불씨와 같아서, 의지적인 노력이 없다면 망각이라는 재 아래 묻히기 쉽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레테의 강'이 망각을 상징한다면, 성경적 진리, 곧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는 잊혔던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리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베푸신 수많은 기적과 인도하심을 의지적으로 떠올리고 되새기는 것은 신앙의 핵심 동력입니다.

유대 전통은 이러한 '기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초막절과 같은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생생하게 전수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월절 밤,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오늘 밤은 어찌하여 다른 밤과 다릅니까?"라고 묻고, 아버지는 출애굽의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했습니다. 쓴 나물을 먹고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허리에 띠를 띠고 급히 먹었던 그날의 긴박함과 하나님의 구원을 몸으로 기억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례(ritual)는 반복과 형식을 통해 공동체의 기억을 강화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매 순간 체험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참고: 조철수, 『기억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시편 111편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공동체의 예배에서 불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행이 시작되는 '알파벳 시편(acrostic poem)'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분의 사역의 충만함을 정교한 문학적 형태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참고: 김정준, 『시편 주석』, CLC).

2.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 진실과 정의, 그리고 영원한 언약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시편 111편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다채롭게 묘사합니다. 그분의 일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3절). 또한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며"(4절),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5절)라고 노래합니다.

특별히 7절은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진실'(אֱמֶת, 에메트)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 '견고함', '신뢰성', '충성됨'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나타냅니다. '정의'(מִשְׁפָּט, 미쉬파트)는 '공의', '올바른 판단', '권리 회복' 등을 포괄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공평무사하고 약자의 편에 서심을 보여줍니다 (참고: 한스 발터 볼프, 『구약성서의 인간학』, 분도출판사). 하나님은 바로 이 '에메트'와 '미쉬파트'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그분의 모든 법도는 흔들림 없이 확실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9절)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맺으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할 때, 우리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는 듯한 평안과 확신을 얻게 됩니다.

시편 111편 6절의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라는 구절은 그 해석에 있어 깊은 성찰을 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은, 단순히 한 민족의 번영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신음하던 소외된 자들, 약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시고, 그곳에서 정의와 공평, 나눔과 섬김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배타적인 선민사상이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포용적인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라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참고: 월터 브루그만, 『예언자적 상상력』, IVP).

3. 기억의 열매: 경외, 지혜, 그리고 영원한 찬양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을까요? 시편 111편 10절은 그 답을 명쾌하게 제시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지혜의 시작이요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훌륭한 지각'(שֵׂכֶל טוֹב, 세켈 토브)을 얻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실천적 지혜, '형통케 하는 이해력'을 의미합니다.

신학적 성찰에서 자주 논의되는 '타율-자율-신율'의 발달 단계는 이 '훌륭한 지각'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규율(타율)에 의해 행동할 수 있지만, 점차 내적인 원리(자율)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성숙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 곧 그분의 마음이 우리 안에 내주하여(신율), 이전에는 나와 무관하게 보였던 타인들을 향한 깊은 공감과 사랑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훌륭한 지각'이며, 이러한 이해에 도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찬양은 입술의 고백을 넘어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찬미가 될 것입니다.

4. 현대인에게 시편 111편이 주는 교훈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망각'의 강에 휩쓸리곤 합니다. 그러나 시편 111편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기억'하라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위대한 일들을 마음에 새기라고 촉구합니다.

  • 일상 속 기억의 실천: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감사 일기를 쓰는 작은 실천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 공동체적 기억의 회복: 예배와 성찬, 교회의 절기 등을 통해 함께 모여 하나님의 행사를 기념하고 선포함으로써, 개인의 기억은 공동체의 기억으로 확장되고 더욱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 하나님 성품 닮아가기: 시편 111편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진실과 정의를 우리 삶의 지표로 삼아, 일상에서 정직하고 공의롭게 행하며, 특별히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율'의 삶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5. 맺음말: 끝나지 않는 찬양의 삶으로

시편 111편이 강조하는 '기억'은 단순한 과거 회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통해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며, 미래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수많은 정보와 자극을 쏟아붓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진리, 곧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기억의 투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의 고백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고 그분의 계명을 따름으로써,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으로 울려 퍼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가에 마음을 쓰곤 합니다. 연예인들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가 대중의 관심이듯, SNS에서는 '좋아요' 수와 조회수가 그 기준이 되기도 하죠. 학자들 역시 자신의 논문이 얼마나 많이 인용되는지로 그 가치를 평가받곤 합니다. 물론 인용 수가 논문의 질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겠지만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도 유독 많이 '인용'된 부분이 있다는 사실, 생각해 보셨나요? 특히 신약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시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시편 110편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왜 이 시편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깊은 울림을 주는지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시편 110편의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이 되게 할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주님께서 시온에서부터 주님의 능력의 홀을 내보내실 것이니, 주님께서는 원수들 한가운데서 다스리십시오.

주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시는 날에, 주님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고, 거룩한 장식을 하고 새벽 이슬처럼 주님의 젊은이들이 주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맹세하시고, 뜻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다."

주님께서 주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그분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흩으실 것이다.

그분께서 뭇 나라를 심판하실 때에, 주검으로 산을 이루게 하시고, 넓은 땅 위에서 통치자들의 머리를 부수실 것이다.

그는 길가에 있는 시냇물을 마시고, 힘을 내어 머리를 높이 들 것이다.

이 시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오른쪽'입니다. 1절의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와 5절의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라는 표현이 그렇죠. '오른쪽'은 전통적으로 권위와 힘, 그리고 특별한 신임을 상징합니다. 고대 중국의 사상에서 왕은 남쪽을 바라보고 앉는데, 이때 왕의 오른쪽은 해가 뜨는 동쪽이 되어 상서로운 방향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임금이 신뢰하는 신하를 오른편에 두는 관습으로 이어졌죠.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하는 것도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공유하며 통치에 참여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고: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이 시는 본래 왕의 대관식 때 불렸던 노래로 보입니다. 여기서 '내 주(Adoni)'는 인간 왕을 지칭하지만, 그 왕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유대 전통에서 왕은 늘 '야훼 하나님(Adonai)' 아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며(Theocracy), 인간 왕은 그분의 권위를 위임받은 대리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왕의 직무는 무엇일까요? 1절은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원수'는 단순히 적대 국가나 반대 세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 넓게는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가는 모든 세력을 포함합니다. 인간의 끝없는 자기중심적 욕망, 사회의 부조리, 자연재해 등은 우리의 삶에서 평화(샬롬)를 깨뜨리고 혼돈을 야기합니다. 왕의 통치는 바로 이러한 혼돈에 맞서 질서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은 혼돈이 완전히 극복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창세기에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처럼(창 3:15),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고 다스리는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중세 성모상에서 마리아가 뱀을 밟고 있는 모습도 이러한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참고: 미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명령은 수동적으로 머무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오른손이 되어 적극적으로 일하라는, 즉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라는 능동적인 요청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도 그저 쉬고 계심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끌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참고: 톰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이어서 2절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라고 노래합니다. '규(홀)'는 왕의 통치권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드러냈듯,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생명과 회복을 상징했듯, 이 '권능의 규'는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권능은 '시온'에서부터 나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지리적 장소를 넘어 우주의 중심(Axis Mundi),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혼돈을 제어하시는 거룩한 산으로 여겨졌습니다. 고대 근동의 우주관에서 '우주의 배꼽'이라 불리는 중심 산은 신들이 내려오는 통로이자 혼돈의 물을 막는 초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혼돈의 샘을 건드렸을 때, 그가 지은 16개의 찬양시로 혼돈의 물이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참고: 바빌론 탈무드, סוכה נג א, 바벨론 탈무드, 수카 53a) 이는 신라 신문왕 때 만 가지 파도를 잠재웠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처럼, 강력한 힘이 아닌 아름다움과 조화, 즉 예술과 영성이 혼돈을 제어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참고: 일연,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 만파식적조)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3절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가슴 벅찬지요! 동틀 무렵 풀잎에 영롱하게 맺히는 이슬처럼, 젊은이들이 순수함과 생명력을 가지고 왕이신 주님께 나아오는 모습입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김교신 선생이 외쳤던 "하나님의 비상소집에 응하라"는 외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이 어둡고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는 절망하기보다 스스로 새벽 이슬이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참고: 김교신, 『성서조선』 관련 논고들) 그리고 이러한 헌신은 '매력'에서 비롯됩니다. 진정한 선교는 강요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매력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 삶을 따르고 싶어지게 만드는 '매력의 감염'입니다. (참고: 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왕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4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신실함으로 왕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약속하십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독특한 인물입니다. 왕이 통치와 정의를 실현하는 역할이라면,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와 아픔을 하나님께 아뢰고 중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제사장 왕'은 단순히 권위로 다스리는 것을 넘어,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참고: F.F. 브루스, 『히브리서』) 신약성경, 특히 히브리서는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히 5-7장).

5-6절은 이 제사장 왕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악한 왕들, 즉 세상에 혼돈을 가져오는 세력들을 심판하고 승리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7절은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그의 머리를 드시리라." 이 시냇물은 단순히 목마름을 해소하는 물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온 세상을 적시던 생명수(창 2:10-14),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와 모든 것을 살리던 그 강물(겔 47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우주의 근원, 즉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마심으로 새 힘을 얻고 당당히 머리를 드는 왕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참고: 게르하르트 폰 라트, 『구약성서 신학』)

시편 110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대표적인 메시아 시편으로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이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혼돈을 제어하고, 모든 사람이 시원한 생명수를 마시듯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도록 섬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새벽 이슬'과 같이 순수하고 새로운 열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과 사역이 마치 '만파식적'처럼, 이 시대의 혼란과 갈등을 잠재우고 하나님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이렇게 시대를 넘어 서로 연결되며, 깊이 연구할수록 더욱 풍성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부디 오늘 나눈 시편 110편의 묵상이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힘과 소망을 불어넣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인간은 종종 지속적인 노력과 시간을 요구하는 과업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시작의 결의는 시간의 흐름 속에 퇴색되어 '작심삼일'이라는 관용구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두꺼운 서적을 완독하는 과정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방대한 분량에 압도감을 느끼지만, 일단 완독이라는 성과를 이루고 나면 이전과는 다른 성취감과 함께 미지의 두려움이 경감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설령 그 내용이 온전히 기억되지 않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인간 내면에 지울 수 없는 긍정적 각인을 남기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장 긴 장인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22개를 따라 각 알파벳마다 8절씩, 총 176절로 구성된 장대한 시편입니다. 이는 마치 22편의 독립된 시가 하나의 주제 아래 엮인 듯, 혹은 8절 단위의 노래가 22곡 수록된 교향곡과도 같은 구조를 지닙니다. 이 장대한 시편의 마지막 부분을 고찰하는 것은 그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되새기는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핵심 주제 아래, 시편 119편 137절부터 144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즉 토라(율법)의 본질과 그 영향력을 심도 있게 드러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시니이다.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 119:137-144)

본 단락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판단', '주의 증거들', '주의 말씀', '주의 법도', '주의 의', '주의 율법', '주의 계명'이라는 일곱 가지 다채로운 명칭으로 지칭하며, 그 속성을 찬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복합적이고 심오한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주의 판단의 정당성: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공정성에 기반하며, 어떤 치우침이나 오류도 없습니다.
  • 주의 증거들의 의로움과 성실성: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은 불변하며 신뢰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고대 유대적 관점에서 '증거'는 언약 관계의 신실함을 확증하는 표징이었습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의 저서 「시편 상」(CLC)에서 이러한 '증거'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실하심을 입증한다고 설명합니다.
  • 주의 말씀의 순수성: 일곱 번 정련한 은과 같이,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시금석이 금의 순도를 판별하듯,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삶의 진정한 가치를 가늠하는 절대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왜곡된 사유가 개입할 여지 없는 순수한 진리의 체계입니다.
  • 주의 법도의 규범성: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원칙과 기준을 제시합니다.
  • 주의 의의 영원성: 일시적 가치를 초월하여, 시간의 변화에도 퇴색하지 않는 영속적인 올바름을 표상합니다.
  • 주의 율법의 진리성: 허위와 기만이 만연한 세상에서 인간을 참된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진리 체계입니다.
  • 주의 계명의 즐거움: 표면적으로는 규제나 부담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그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깨닫고 순종할 때, 세속적 가치로는 얻을 수 없는 심오한 내적 기쁨과 성취감을 부여합니다. C.S. 루이스(C.S. Lewis)는 그의 저서 「시편 사색」에서 율법 준수의 기쁨을 춤의 규칙을 따름으로써 자유로운 춤을 추는 것에 비유하며, 규율 속에서 참된 자유와 즐거움이 발현됨을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속성들은 하나님의 빛이 인간의 삶에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팔복이 단일한 하나님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발현되듯,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 속에서 의로움, 성실함, 순수함, 영원함, 진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이라는 고귀한 가치로 구현됩니다. 만일 인간의 삶을 통해 이러한 빛의 속성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는 내면의 욕망이라는 어둠이 그 빛을 차단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1. 새벽의 기도와 말씀 묵상 (시 119:145-152)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시 119:145-152)

시인은 하루의 시작점인 새벽, 동트기 전부터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분의 말씀을 열망하고 묵상하는 경건의 자세를 보입니다. 유대 전통은 하루 세 번의 정규 기도(테필라, Tefillah)와 아침저녁의 쉐마(Shema) 낭송을 통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행위를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경건의 습관은 영혼을 세속적 소란으로부터 보호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통로로 인식되었습니다.

영국 교회의 고전 기도문 중에는 하루를 시작하며 드리는 기도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제게 임하셔서 제 마음을 주님의 처소로 삼아 주소서. 종일토록 제 안의 부정적이고 우울한 상념들, 타인을 향한 증오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자기중심적 태도와 교만한 자세를 버리게 하소서. 주님의 영이 제 삶을 강력하게 인도하시도록, 정결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하소서. 오늘 하루 제가 타인에게 어떤 해도 입히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선한 믿음의 덕을 쌓는 일을 행하게 하소서. 저를 도우시어, 주님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소서. 오늘 제가 드리는 이 기도가, 타인들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주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희망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아멘."

이 기도는 마음을 주님의 처소로 내어드릴 때, 미움과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과 사랑으로 살아갈 내적 동력을 얻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오늘 제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구절은, 인간의 언행, 심지어 외적인 모습까지도 타인에게 무의식적인 해를 가할 수 있음을 성찰하게 합니다. 나아가 "다른 이들이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간구는, 인간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타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숭고한 소명을 제시합니다.

시인은 악을 추종하는 세력의 위협 속에서도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라고 선언하며 내적 안정감을 유지합니다. 이는 말씀 안에 거주하는 자가 누리는 견고함의 근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고난 중의 간구와 믿음의 심화 (시 119:153-160)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주께서 나를 변화하시고 나를 구원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를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많으시오니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나를 핍박하는 자들과 나의 대적들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니이다." (시 119:153-160)

시인은 자신이 처한 고난을 하나님께 토로하며 구원을 요청합니다. "나의 고난을 보소서, 나를 건지소서, 나를 변호하소서, 나를 살리소서"라는 반복적인 호소는 그가 직면한 상황의 절박성을 강조합니다. 인간 사회는 종종 불의가 횡행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핍박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목도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증언하듯,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으나 어둠이 그 빛을 영접하지 않은 상황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요 1:5, 10-11).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며 세상 권세를 미끼로 유혹했듯이(마 4:8-9), 세상의 권력은 때로 불의한 방식으로 약자를 억압하고 불평등한 구조를 심화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실함을 지키려는 이들은 깊은 내적 갈등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간구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의 궁극적 주관자는 세상의 권세가 아닌 하나님이라는 심오한 인식을 얻게 됩니다. 이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 나무가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는 현상과 같이, 고난이 오히려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즉 삶의 중심에 유일한 주인을 모시면 어떤 외부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동양적 지혜는 이러한 맥락에서 유의미합니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값싼 은혜를 경계하고 고난을 통한 제자도의 실천을 강조했는데, 시인의 모습은 이러한 제자도의 한 단면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시인은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살리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사랑은 결코 철회되지 않는다는 사도 바울의 확신처럼(롬 11:29),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이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됩니다.

3. 세속적 가치와 구별되는 기쁨, 말씀 안의 평안 (시 119:161-168)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시 119:161-168)

권세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핍박하는 불의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의 마음은 오직 주의 말씀을 경외하며 그 안에서 본질적인 즐거움을 찾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한 자의 기쁨에 비견될 만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환희합니다. 이는 부, 명예, 권력 등 세속적 가치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기쁨입니다. 유대 주석가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Abraham Ibn Ezra)는 시편 119편의 정교한 알파벳 구조가 토라의 완전성과 포괄성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는데, 이는 토라 자체가 완전한 기쁨과 만족의 원천이라는 시인의 고백과 상통합니다.

그는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단순한 찬양의 횟수를 넘어,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전인적인 삶의 태도를 시사합니다. 마치 수영 시 규칙적인 호흡을 통해 지속적인 유영이 가능하듯,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의도적으로 멈추어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는 영적 호흡은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공급합니다. 이러한 삶의 규율을 체득할 때, 인간은 세상의 불의와 악의 영향력에 예속되지 않고 내면의 평안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폭력은 그 앞에 굴복하는 대상이 있을 때 더욱 확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요동하지 않을 때, 악의 세력은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된 '큰 평안(샬롬)'은 단순히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충만함과 안전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4. 간구에서 찬양으로, 잃은 양을 향한 목자의 추적 (시 119:169-176)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였사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 119:169-176)

시편 119편의 대단원은 시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시작하여, 주의 말씀에 의한 깨달음과 구원을 거쳐 찬양에 이르는 점진적이고 심화된 신앙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때로 언어화되지 않은 깊은 탄식으로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형화된 기도뿐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신음까지도 헤아리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박윤선 박사는 그의 「시편 주석」(영음사)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세밀한 관심을 강조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모든 계명이 의롭기 때문에 그 말씀을 노래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며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에는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이 형성되며, 이를 통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 간구할 수 있는 영적 담대함이 부여됩니다.

믿음의 본질은 '맡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자가 구조자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몸을 의탁하듯,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말씀이 지닌 구원 능력에 자신의 삶 전체를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때로 인생의 거친 풍랑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안전하게 부양하는 생명의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였사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라는 겸손한 자기 인식과 동시에 끝까지 주의 계명을 붙들려는 의지를 담은 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 연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갈망하며 말씀을 향한 지향성을 잃지 않으려는 신앙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으로 복잡다단합니다. 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때로는 마음마저 어지러워 "아, 인생이 조금만 더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잡한 세상을 꿰뚫어 보고 그 안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그 복잡함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즉 깊이 있는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앎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단순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정글 속에서 길을 내는 원주민의 칼과 같습니다. 얽히고설킨 나무들 사이로 정글칼을 휘둘러 길을 만들듯, 말씀은 복잡한 인생사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시편 119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 삶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지혜의 노래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지혜와 삶의 태도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1.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의 지혜 (시편 119:97-10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 119:97-100, 103-104)

시인은 주의 법을 "종일 읊조릴" 만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랑은 그에게 놀라운 지혜를 선사합니다. 원수보다, 스승보다, 심지어 경험 많은 노인보다 더 지혜롭고 명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철함'은 단순한 지식 축적을 넘어선 깊은 이해력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옛 어르신들이 삿자리를 짤 때, 먼저 세로줄인 '날실'을 팽팽하게 걸어놓고 거기에 가로줄인 '씨실'을 엮어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날실이 굳건히 중심을 잡아주어야 씨실이 반듯하게 쌓여 아름다운 삿자리가 완성되듯,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수직적 기준, 즉 '캐논(canon, 척도, 규범)'이 우리 삶에 굳건히 서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온갖 유혹과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율법(토라)'은 바로 이러한 삶의 기준과 규범을 의미하며, 유대 전통에서 토라 연구와 준수는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습니다. (참고: Bruce K. Waltke, An Old Testament Theology)

이처럼 수직의 중심이 확고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않게 됩니다. 마치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이 자신이 아끼던 기생 천관녀의 집으로 향하는 말의 목을 베어 결단했던 일화처럼(비록 그 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죄의 유혹 앞에서 단호히 돌아설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에 맛을 들인 자에게 그 말씀은 입에 꿀보다 더 달콤하며,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고 명철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2.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신 말씀 (시편 119:105-112)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 나의 생명이 항상 위태로운 중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시 119:105-106, 109-111)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구절은 시편 119편 전체의 핵심이자,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사랑받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그 길 위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곁길로 빠지기도 하며, 때로는 엉뚱한 길로 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24)고 권면하셨습니다. 이 좁은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군가가 내 발 앞을 등불로 밝혀준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세상에는 우리의 참된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많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바른 삶을 막는 세 가지 독으로 탐욕(貪), 진에(瞋, 분노), 우치(癡, 어리석음)를 드는데, 이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라 합니다. (참고: 대한불교조계종 포털) 중국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어리석음), 저팔계(탐욕), 사오정(소통 부재로 인한 답답함, 혹은 분노의 요소) 역시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들이 통천하(通天河)라는 거대한 강을 건널 때, 오직 진리를 구하다 좌절한 이들의 해골만이 물에 떴고, 그것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진리를 향한 험난한 여정은 선각자들의 희생과 지혜에 의지하여 함께 난관을 헤쳐나가야 함을 암시합니다.

초대교회 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 약 160-220년)은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Sanguis martyrum semen ecclesiae est)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참고: Tertullian, Apologeticus, Chapter 50)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진리의 말씀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의 바다를 건널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라고 결단합니다. 결혼 서약처럼, 이 약속은 변치 않는 책임감을 동반합니다. 사랑이 단순한 감정을 넘어선 책임이듯,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결단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약속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위기, 악인들의 올무가 닥쳐와도 주의 법을 잊지 않고 떠나지 않으며, 나아가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을 "내 마음의 즐거움"으로 삼겠다고 고백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해야 할 일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지혜, 나아가 그 사명 자체를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믿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3. 주님은 나의 은신처, 두 마음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시편 119:113-120)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시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시 119:113-114, 119-120)

세상에는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세상에서 더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단호하게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만으로는 황폐해지기 쉽지만, 주님의 법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균형을 찾고 견고해집니다. 이는 로마서 12장 9절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말씀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의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권면과 일맥상통합니다.

악한 자들을 향해서는 "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라고 명확히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연약하기에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시 119:117)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은신처요 방패이시며, 세상의 악인들을 찌꺼기같이 버리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우리는 주님의 증거들을 더욱 사랑하고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경외하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경외심은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끌려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4.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주의 구원을 사모함 (시편 119:121-128)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 119:121, 123, 128)

시인은 자신이 '정의(미쉬파트, מִשְׁפָּט)'와 '공의(체다카, צְדָקָה)'를 행했다고 말합니다. '미쉬파트'는 주로 법정에서의 공정한 판결, 즉 사법적 정의를 의미합니다. 힘 있는 자에게 유리하거나 약자를 억압하는 불의가 없는 사회의 기초입니다. 반면 '체다카'는 관계적 정의, 회복적 정의에 가깝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며,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를 반영합니다. (참고: 김근주, 『특강 예레미야』, IVP) 이 두 가지 정의는 구약 성서의 핵심 가치이며, 이 모든 것을 감싸는 더 큰 원리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헤세드(חֶסֶד)'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삶 속에서 실천했기에 박해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넘기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의롭게 살고자 할 때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피곤할 정도로 주의 구원과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며, 모든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거짓 행위를 미워합니다. 이는 지금이 바로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이오니"(시 119:126)라는 믿음, 즉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5.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 (시편 119:129-136)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시 119:129-130, 133, 136)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마치 어두컴컴한 방에 창문을 열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방 안을 환하게 밝히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우리 마음이 어둠과 무명(無明, 빛 없음)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통로가 됩니다. 성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boni)'으로 설명했습니다. (참고: Augustine, Confessions, Book VII) 즉, 어둠이나 악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선이 부재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 때, 그 말씀의 빛이 우리 내면의 어둠을 몰아내고 우둔함을 깨우쳐 지혜에 이르게 합니다.

시인은 주의 계명을 사모하여 "입을 열고 헐떡였다"(시 119:131)고 표현합니다. 이는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는 고백처럼, 말씀에 대한 깊은 갈망을 보여줍니다. 그는 죄악이 자신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 위에 굳게 세워주시길 간구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고 경고하셨지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를 다스리기 어렵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얼굴 빛을 구합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135). 주님의 얼굴 빛을 뵌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총, 용납과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오랜 세월 끝에 형 에서를 만났을 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용서와 수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시선은 자신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나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눈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의 모습입니다.

맺음말: 내 삶의 창문을 열어 빛으로 나아가기

창문 없는 집이 어둡듯,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마음은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그 어둠을 밝히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의 창문, 하나님의 말씀을 여는 것입니다. 말씀을 열 때, 그 안에서 생명의 빛이 흘러나와 우리의 삶을 비추고 인도할 것입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편 119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이 되고 길에 빛이 되어, 단순하지만 능력 있는 삶, 지혜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시편 119:53

성경에서 가장 긴 장으로 알려진 시편 119편은 마치 깊은 샘물과 같아서, 그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갈수록 새로운 의미와 위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의 글자 하나하나가 각 여덟 절씩, 총 176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 곧 토라(תּוֹרָה, 가르침, 율법)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을 노래하는 장대한 교향곡과도 같습니다. 첫 번째 연은 첫 글자 '알렙'으로 시작하는 여덟 절, 두 번째 연은 두 번째 글자 '베트'로 시작하는 여덟 절, 이런 식으로 그 구조부터 경이로움을 자아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시편을 읽으며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고 느껴 쉽게 지나치기도 하지만, 이 시편은 반복되는 듯한 구절 속에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깊은 지혜와 위로를 담고 있는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이 시편의 구절들이 때로는 지친 마음에 작은 힘과 소망의 빛을 건네주기도 합니다.

고난 중에 만난 말씀의 위로 (시편 119:49-56)

시편 119편 49절에서 56절에는 이러한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시 119:49-56)

이 고백은 "주님의 법도를 지킨 것이 나의 힘입니다"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인생의 광야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준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요?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 周作)는 그의 작품 속에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보다는 고통받는 이들 곁을 묵묵히 지키며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기적은 없었지만, 그 따뜻한 동행을 통해 사람들은 회복의 경험을 합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50절에서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고, 때로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이 왔을까?"라는 자책에 빠지게 합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정죄의 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있다면 그 고통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떠나지 않은 참된 벗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과 '나'의 깊은 관계를 발견합니다. "말씀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동시에 "나 또한 말씀을 떠나지 않았다"는 능동적인 신앙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내주, 內住), 내가 말씀 안에 거하는 상호적인 사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 내면의 거처를 정하고 우리를 지키시는 신비입니다. 저명한 구약학자 발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의 저서 『이스라엘의 신앙』(Theology of the Old Testament)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다바르, דָּבָר)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다바르'는 사건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기억의 힘, 회복의 능력 (시편 119:49, 52, 55)

시인은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49절),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52절),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55절)라고 반복해서 '기억'을 언급합니다. 영어 단어 'remember'는 're-member', 즉 '다시(re) 구성원(member)이 되다'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잊고 지냈던 가족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금 소속되는 것,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것, 이것이 기억의 힘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떠나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는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라며 아버지 집을 '기억'합니다. 성경은 이때 그가 "이에 스스로 돌이켜(He came to himself)"라고 기록합니다(눅 15:17). 잃어버렸던 아들의 자리, 가족의 구성원으로 '다시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은혜를 되새기는 것을 넘어, 현재의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확인시키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공급받는 과정입니다. 유대교에서 '자카르'(זָכַר, 기억하다)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현재화하여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지는 중요한 신앙 행위입니다.

의로운 분노와 예언자적 외침 (시편 119:53)

그러나 시인은 위로와 소망만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53절에서 그는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라고 외칩니다. 우리 시대는 종종 이러한 '거룩한 분노'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개인의 이익이 침해당하면 쉽게 분노하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히고 주의 법도가 무시당하는 현실에는 무감각해지곤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일컫는 히브리어 '나비'(נָבִי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프로페테스'(προφήτης)로 번역되는데, '프로'(대신하여)와 '페테스'(말하는 자)의 합성어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마음, 특히 불의한 세상과 사랑 없는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말씀이 자신 속에서 불타는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렘 20:9).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은 그의 명저 『예언자들』(The Prophets)에서 예언자적 감수성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이러한 거룩한 분노를 조금은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준 (시편 119:57-64)

다음으로 57절에서 64절을 보면,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라고 선포합니다. '분깃'(חֵלֶק, 헤레크)이라는 단어는 주로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기업이 없을 때,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분깃이 되어 주신다는 약속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민 18:20). 시인은 바로 이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기업이며 삶의 목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삶의 지향점이 '여호와는 나의 분깃'으로 분명해질 때, 우리의 인생은 방황을 멈추고 단순하지만 굳건해집니다. 이익과 정의의 갈림길에서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하나님을 나의 분깃으로 삼은 자는 그 선택의 기준이 명확하기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홀로 가는 것은 때로 벅차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63절)고 고백합니다. '벗'(友)이라는 한자는 오른손을 함께 잡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손을 잡아주는 친구, 함께 걷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신학자들은 이를 '지원 공동체'(support communit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넘어진 우리를 책망하기보다 아픔을 알아주고 따뜻한 코코아 한 잔처럼 위로하며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공동체, 이것이 바로 서로를 아끼는 이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저서 『성도의 공동생활』(Life Together)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됨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강력한 힘을 지니는지 강조합니다.

고난의 유익, 겸손의 가르침 (시편 119:65-72)

시인은 67절과 71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고난이 때로는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도리깨질이 콩깍지를 벗겨내고 알곡을 드러내듯, 고난은 우리 삶의 불필요한 껍데기들을 벗겨내고 가장 빛나는 핵심, 즉 겸손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드러나게 합니다.

늘 건강하기만 한 사람은 아픈 이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넘어짐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게 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많은 고난을 겪어야 사람이 겸손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은 피하고 싶은 불청객이지만, 그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 또한 없었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반면, 고난을 통해 배우지 못한 "교만한 자들의 마음은 기름 같이 둔하여졌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70절). '마음이 기름 같이 둔하다'는 것은 분별력을 잃고 무디어졌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때로 우리 마음의 밭을 갈아엎어 부드럽게 하고,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연기 속의 가죽부대처럼, 그러나 잊지 않는 말씀 (시편 119:81-88)

시인의 고통은 83절에서 "내가 연기 속에 둔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라는 처절한 묘사로 절정에 이릅니다. 연기 속에 그을린 가죽부대(נֹאד בְּקִיטוֹר, 노드 베키토르)는 바싹 마르고 쭈그러들어 쓸모없게 된 상태를 그립니다. 인생이 그처럼 고달프고, 교만한 자들이 파놓은 웅덩이에 빠져 거의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시인은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나이다"(87절)라고 외칩니다. 이는 고난의 극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신앙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영원히 굳건한 말씀, 흔들리는 세상 속의 닻 (시편 119:89-96)

세상의 가치와 법도는 수시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내면 또한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89-91절).

인간의 마음(人心)은 위태롭고 변화무쌍하지만, 하늘과 땅에 굳게 선 하나님의 법도(道心)는 영원불변합니다. 만물의 질서 속에 깃든 하나님의 법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영원한 그 말씀을 붙잡고 든든히 서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C.S. 루이스(C.S. Lewis)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보편적인 도덕률, 즉 자연법의 존재를 주장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는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기준이 됩니다. 오늘날 기후 변화를 보고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다고 다들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질서를 보존하기 윈한 자연의 작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지 모릅니다.

맺음말: 말씀의 빛을 따라 걷는 삶

시편 119편을 찬찬히 읽다 보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이에게 주어지는 깊은 위로와 잔잔한 힘, 그리고 꺼지지 않는 소망의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길이 보이지 않고 인생이 고단하게 느껴질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 내면을 비추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등불일 것입니다. 그 빛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변함없는 평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연기 속의 가죽부대처럼 우리의 삶이 초라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순간 주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고 그분의 말씀을 가만히 되새길 때, 우리는 다시금 소중한 존재로서 그분의 따뜻한 품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시편이 건네는 희망의 속삭임이 오늘, 우리 곁에 머물기를 바라봅니다.

"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

시편 119:5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합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발만 동동 구르거나, 나아갈 방향을 몰라 막막했던 순간들이 우리네 인생길에도 종종 찾아오곤 하지요.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단 한 걸음이라도 내디딜 수 있도록 작은 빛이라도 있었으면….’ 먼 미래를 다 조망할 순 없더라도, 바로 앞 한 걸음을 안전하게 내디딜 곳을 분별할 빛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러한 인생의 여정에서 시편 119편의 한 구절은 오래도록 마음에 등불처럼 남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 하나님의 말씀은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바로 앞을 비추는 등불과 같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가 각 연의 첫 글자로 사용된 아름다운 답관체 형식의 시인데, 그 첫 번째 노래(1-8절)를 통해 복 있는 사람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 119:1-2, 8)

 

시편 1편이 그리는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은 시편 119편에서도 이어집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온전하다’(תָּמִים, 타밈)는 것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함(perfection)이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온전함(integrity), 즉 전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비록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중심을 잃지 않을 때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라는 따뜻한 위로를 받습니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 우리를 세우곤 합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 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노래했듯이, 우리는 모든 길을 다 가볼 수 없습니다. 하나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며, 포기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늘 우리 마음에 남곤 합니다. 옛 어른들의 지혜 속에 **"택선고집(擇善固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것(善)을 선택했으면, 그것을 굳건히 붙잡고 흔들리지 말라는, 삶의 갈피를 잡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이지요.

 

유학의 경전인 『중용(中庸)』을 보면, 주희(朱熹)는 그 핵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심은 유위(人心惟危)하고 도심은 유미(道心惟微)하니, 유정유일(惟精惟一)하여 윤집궐중(允執厥中)하라." (『중용장구서』) 풀어 말하면,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변하기 쉬우나, 도의 마음(진리)은 미묘하여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마음을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심(中)을 진실로 굳게 잡으라는 뜻입니다. 이 '중심'을 기독교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분을 인생의 길로 삼고 그 길을 굳건히 붙잡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삶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 계명에 주의할 때, 부끄러움 없는 인생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시 119:5-6). 부끄러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들 하지요. 하나는 자신이 세운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자기적 부끄러움'(자괴감)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규범을 어겨 타인의 시선 앞에서 느끼는 '창피함'입니다. 진정으로 부끄러움 없는 삶이란,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눅 6:45)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가득할 때, 우리의 삶은 그 말씀의 향기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칭하는 다양한 단어들 – 율법(תּוֹרָה, 토라), 증거(עֵדוּת, 에두트), 도(דֶּרֶךְ, 데레크), 법도(פִּקּוּדִים, 피쿠딤), 율례(חֹק, 호크), 계명(מִצְוָה, 미츠바), 의로운 판단(מִשְׁפָּטִים צַדִּיקִים, 미쉬파팀 차디킴) – 이 아름다운 선율처럼 변주되며 나타납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가르침을 가리키는 다채로운 표현들이지요.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시 119:9) 묻고, 이내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라고 답합니다. 이 질문은 비단 청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전심으로 주를 찾고, 범죄하지 않기 위해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고 고백합니다(시 119:10-11).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는 고백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고대 유대 전통에서 쉐마(신 6:4-9)를 암송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 행위였습니다. 말씀을 입술로 읊조리고(הָגָה, 하가 - 묵상하다), 그 길에 주의하며 즐거워하는 것(시 119:14-16), 이것이 바로 묵상의 한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일반적인 독서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소리 내어 읽을 때 시각뿐 아니라 청각까지 동원되어 말씀이 더욱 깊이 새겨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깨끗함이란 깨달음의 끝"**이라는 통찰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진정한 깨끗함은 금욕적인 삶을 넘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깊이 거할 때 이루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더러워진 유리창은 마른 걸레로도 닦이지만, 복잡하게 얽힌 우리 마음의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맑은 물로 씻어낼 때 비로소 정갈해지는 법인가 봅니다.

때로 우리는 고관들이 비방하고 위협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시 119:23).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을 때와 유사하지요(행 4:18-20).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시인이 고관들의 비방 속에서도 주의 율례를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는 대목은, 세상의 권세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더 깊이 새기는 한 인간의 내면적 투쟁과 승리를 보여주는 듯하여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러한 담대함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는 간구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은 『고백록』에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불안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그리움은 어쩌면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나그네 인생길의 참된 방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듯(시 119:25),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아내리는 듯(시 119:28)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영혼이 무너질 때 우리는 마치 흙먼지처럼 힘없이 주저앉습니다.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라며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처럼(창 2:7), 그분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힘이 있음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넓히실 때(이해력을 넓히실 때), 비로소 주의 계명들의 길로 힘차게 달려갈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시 119:32).

이러한 회복은 열린 마음으로 배우려는 자세에서 시작되는 듯합니다. 시인은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시 119:33),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시 119:34)라고 간구합니다. 배울 학(學), 깨달을 각(覺), 익힐 습(習)의 자세로, 마음을 주의 증거들로 향하게 하고(向), 허탄한 것에서 눈을 돌려 주 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기를(建) 소망하는 모습입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만큼 성장을 가로막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늘 배우려는 열린 자세야말로 시인이 보여준 지혜이며,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어 주는 듯합니다.

 

결국 시편 119편의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써 한 사람이 세상 앞에서 얼마나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대한 서사시와 같습니다(시 119:41-48). 주님의 인자하심과 구원하심이 함께함을 깨달을 때, 비방하는 자들에게 담대히 맞설 용기가 생깁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시 119:45)라는 말씀처럼, 진정한 자유는 세상의 권력이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중심에 모실 때 주어지는 내면의 상태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에서 자유하나 복음을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9:19). 예수님께서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수많은 소리와 가치관들로 혼란스럽습니다. 때로는 위축되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19편의 기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비결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시편 119편은 단순한 율법 찬양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이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얼마나 역동적으로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기록입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때로 세상의 가치에 압도되어 위축될지라도, 영원불변한 진리의 말씀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어떨까요. 이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둘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어떠한 환경과 비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내면의 깊은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그 안에서 참된 힘과 지혜를 얻는 여정, 그것이 바로 이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깨달음을 전해주는 듯합니다.

말의 힘, 삶의 기초: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넘실댑니다. 말은 본래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지요. 마치 음악에서 음과 음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이음줄(slur)’처럼 말입니다. 이음줄이 없다면 음악은 뚝뚝 끊어져 딱딱하게 들릴 거예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주기 위해 생겨났죠.

하지만 이 아름다운 연결고리인 말이 때로는 그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선한 가면을 쓰고 다가오는 악한 의도의 말들, 생각만 해도 오싹하지 않나요? 우리 주변에는 알면서도 속아주는, 혹은 교묘하게 오용되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식당에서 누군가 "이거 진짜 맛있어요!"라고 외칠 때, 그 말에는 정말 감탄만 담겨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숨어있을까요? 부모님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고 하실 때, 물론 자식을 위한 진심 어린 마음이 크겠지만, 때로는 부모님 자신의 바람이나 불안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말 역시 때로는 자유를 주는 대신 상대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기도 하죠.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과 자유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했죠. 구속하는 사랑은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종교적인 맥락에서도 이런 오용은 비일비재합니다. 진심으로 축복을 빌어주는 "축복합니다"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합리적인 해결 대신 불합리한 방식을 강요하며 "은혜롭게 해결합시다"라고 말하는 상황은 곤란합니다. 가장 강력하게 오용될 수 있는 말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일 겁니다. 이 말은 때로 모든 토론을 차단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권위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참다운 말'에 대한 공부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그분의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속 지혜의 샘, 토라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시편 119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무려 176절에 달하죠. 이 장대한 시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토라(Torah)'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흔히 '모세오경'으로 알려진 토라는 단순히 다섯 권의 책을 넘어 '가르침'이라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를 향한 가르침일까요?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말씀이었죠.

시편에는 다양한 노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토라'를 노래하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시편 전체의 문을 여는 시편 1편, 그리고 시편 19편,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119편이 대표적입니다. 이 시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 즉 토라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네 가지 도구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분별할 수 있을까요? 신학자들은 보통 세 종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of God)', 바로 성경입니다. 둘째는 '선포된 말씀', 즉 설교와 같이 대언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육신이 되신 말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우리의 신앙은 이 세 가지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포된 말씀은 때로 기록된 말씀의 본래 맥락에서 벗어나 왜곡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 구절이 화자의 의도를 강화하기 위한 권위로만 사용될 때, 그야말로 오용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18세기 영국의 신학자이자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성경(Scripture)', '전통(Tradition)', '체험(Experience)', 그리고 '이성(Reason)'입니다. 이 네 가지를 '웨슬리안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부르죠.

  • 성경은 가장 기본적인 권위입니다.
  • 전통은 오랜 시간 교회가 쌓아온 교리와 해석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교리(라틴어 dogma의 어원은 '근사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의 신앙 경험이 왜곡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체험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만남을 통해 얻는 깨달음입니다. 체험 없는 신앙은 '그들이 말하기를' 식의 간접적인 지식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 이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판단력과 분별의 능력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건강하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죠. 예를 들어 전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개인의 체험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에는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을 통해 경험되고 문자화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전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를 잃지 않는 이유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때문인 것처럼, 성경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삶의 기초를 세우는 지혜, 토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즉 토라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과 삶의 기초가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살라'는 생명의 명령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셨던 고(故) 신영복 선생님의 글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랜 수감 생활을 하셨던 선생님은 감옥에서 만난 한 목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적으셨죠. 보통 사람들은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김 목수님은 언제나 집을 짓는 순서대로, 즉 기초부터 차근차근 그려나갔다고 합니다. 머리와 관념으로 사는 사람은 위에서부터 생각하지만, 몸으로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은 가장 기초부터 쌓아 올리는 법을 안다는 것이죠. 이 일화는 우리 인생에서도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토라가 바로 우리 인생의 집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넘어선 가르침, 토라

시편 1편 3절은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그'는 밤낮으로 주님의 율법, 즉 토라를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9편은 여호와의 도(토라)가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시편 119편 역시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율법과 복음이 대조되는 것을 보았고,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죠. 이는 '토라'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 '노모스(nomos)'로 번역되면서 '법규, 규정'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라의 본래 의미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든든하게 세워주는 기초가 됩니다.

토라에는 두 가지 핵심 초점이 있습니다. 마치 타원형에 두 개의 초점이 있듯이 말이죠. 첫째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Haggadah, 하가다)'입니다. 이것이 우선적인 핵심입니다. 둘째는 이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 위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방식(Halakha, 할라카)'입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먼저 있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삶의 태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토라 찬미의 교향곡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로 시작하지만, 원문에 가깝게는 "복이 있다! 그 사람은..."으로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토라를 묵상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존재 깊숙이 내면화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했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명확히 대조하며, 결국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고, 그분의 뜻을 삶으로 번역해내려는 노력, 이것이 복 있는 삶의 핵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창설자 성 베네딕토의 모습이 주로 침묵하고 묵상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입을 닫고 들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오용하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도 본래는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고(구하라),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탐구하며 애쓰라(찾으라, 두드리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시편 119편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 시는 176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 각각에 8절씩 할애하여 구성된 '알파벳 시(acrostic poem)'입니다. 예를 들어 첫 8절은 히브리어 첫 글자인 '알렙(Aleph)'으로 시작하고, 그다음 8절은 두 번째 글자인 '베트(Beth)'로 시작하는 식입니다. 각 절이 해당 알파벳으로 시작되도록 정교하게 짜인 것이죠 (약간의 예외는 있습니다). 이는 암송을 돕고, 각 알파벳에 담긴 의미를 통해 토라의 다양한 측면을 노래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이 장대한 시는 한 사람의 천재적인 영감으로 단숨에 쓰인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공동체의 '집단 지성'이 오랜 시간 다듬고 수정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쉬운 점은 번역 과정에서 히브리어 알파벳이 주는 독특한 리듬과 구조미를 온전히 살리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토라, 자유를 향한 길

그렇다면 시편 119편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바로 토라에 기반한 삶이 진정으로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며,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라를 기초로 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삶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시편 119편 45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 (새번역: 내가 주님의 법도를 열심히 지켰으니, 이제는 넓고 확 트인 길을 거닐겠습니다)."

이 구절 속에 시편 119편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자유인이 되게 합니다.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은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이라고 노래하며 자유를 향한 삶을 그렸습니다. 또한 고대 중국 철학자 장자(莊子)의 사상을 빌려 표현하자면, 오직 한 분(하나님, 혹은 道)에게만 내 삶을 온전히 맡길 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면, 세상의 다른 것들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시편 119편은 토라,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인가'임을 보여줍니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수많은 구속에 얽매여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시는 영혼의 자유를 향한 길을 안내하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디딜 때, 우리는 비로소 시냇가에 심겨 철따라 열매 맺는 나무처럼 풍성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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