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욥기 7장 16절
(I) 서론: 우리가 함께 짊어진 삶의 무게
매일의 의무와 책임감, 시간의 압박 속에서 느끼는 이 버거움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짊어지고 가는 삶의 무게입니다. 그런데 이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넘어, 때로는 삶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고통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오해받고, 비난받고,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홀로 외딴 섬처럼 느껴지는 깊은 고립감. 이러한 실존적 고통의 심연으로 우리를 이끄는 인물이 바로 욥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일상의 고단함을 넘어,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와 외로움의 본질, 그리고 그 속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신앙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욥의 여정을 따라가며,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느끼는 버거움의 근원을 탐색하고,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 정신의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II)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깊이: 바다 모래보다 무거운 것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욥기 6:2-3). 상상할 수 없는 무게입니다. 자녀를 모두 잃고,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온몸은 끔찍한 질병으로 망가졌습니다. 그 어떤 저울로도, 어떤 언어로도 그의 고통의 총량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바다 모래보다 무겁다"는 이 표현은 단순히 고통의 양이 많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와 측량의 범위를 벗어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바다 모래의 무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 '알 수 없음'이 욥이 겪는 고통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그의 고통은 너무나 거대하고 압도적이어서, 그 자신조차 그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헤아릴 수 없음은 욥을 더욱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자신의 고통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위로하러 찾아왔지만, 그들의 섣부른 판단과 충고는 오히려 욥의 고립감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측정 불가능하고 이해 불가능한 고통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혼자가 됩니다. 이처럼 극심한 고통의 경험은 우리에게 고통의 무게뿐 아니라, 그것이 동반하는 지독한 외로움과 단절의 아픔을 함께 느끼게 합니다.
(III) 외로움과 고독: 홀로 있음의 두 얼굴
우리는 종종 '홀로 있음'이라는 상태를 부정적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홀로 있음'의 두 가지 다른 차원을 제시하며, 이를 '외로움'(외로움)과 '고독'(고독)이라는 말로 구분합니다.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쓸쓸함'으로 정의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마음 둘 곳 없이 홀로 고립된 듯한 느낌, 흔히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되는 상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원치 않는 고립이며, 영혼의 황량함과 연결됩니다. 친구들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몰이해 속에서 욥이 느꼈을 감정이 바로 이 '외로움'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는 친구들 속에서 더욱 철저히 혼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고독'은 '홀로 있음의 영광'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외로움처럼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성찰과 창조성, 나아가 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홀로 있음입니다. 기독교 전통 속 수도자들이 세상의 번잡함을 피해 사막이나 봉쇄된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 '고독'을 찾기 위함입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처럼, 오롯이 하느님과 마주하는 그 '홀로 있는 시간'을 갈망하며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물러서고자 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고독은 쓸쓸함이 아니라 충만함이며, 영적인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공간입니다.
외로움이 우리를 누군가를 원망하게 하고 삶을 무겁게 만든다면, 고독은 우리를 자기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게 하여 스스로를 성찰하게 합니다. 이 깊은 자기 성찰의 과정 속에서 외로움은 고독으로 승화될 수 있으며, 이 고독은 다시 창조적인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종종 우리에게서 고독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을 빼앗아 갑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듣고, 보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홀로 있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잠들기 직전까지 TV나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모습은 어쩌면 이 고독에 대한 두려움의 반영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지만, 진정으로 사람다워지기 위해서는 고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표: 홀로 있음의 이해: 외로움 vs. 고독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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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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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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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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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 황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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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충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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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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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의에 의한 고립 (군중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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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선택 / 가꾸어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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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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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움, 공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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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적, 깊어짐, 잠재적으로 신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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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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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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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발견, 창조성, 신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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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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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속 욥의 초기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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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수도자, 토마스 머튼의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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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는 외로움과 고독의 핵심적인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홀로 있음'이라는 동일한 상태가 어떻게 경험되고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내면 풍경을 탐색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어가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IV) 차가운 위로의 실패: 신학보다 절실한 공감
욥의 고통 앞에 선 친구 엘리바스의 반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는 욥에게 직접적으로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는 식의 부드러운 말 속에 숨겨진 '차가운 신학'으로 욥의 상황을 재단하려 합니다. 고통의 원인을 죄와 연결 짓는 인과응보적 틀 안에서 욥의 상황을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그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논리적이고 신학적으로 타당해 보일 수 있지만, 극한의 고통 속에 있는 욥에게는 비수처럼 꽂히는 말이었습니다.
욥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나 도덕적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아픔을 함께 느껴주고,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따뜻한 현존, 즉 '공감'(공감)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친구들의 모습을 '와디'(Wadi)에 비유합니다. 와디는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가 되면 바싹 말라버리는 사막의 개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마치 이 와디처럼, 욥이 가장 절실하게 위로와 지지를 필요로 할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진다", 욥기 6:15-17).
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창한 조언자가 아니라, 그저 다가와 손을 잡아주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공감의 본질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바로 이 공감의 능력을 발휘할 때입니다.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악한 힘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듭니다.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에 대해 "또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라며 무심하게 넘겨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본연의 마음, 즉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엘리바스의 실패는 깊은 고통 앞에서 섣부른 설명이나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잘 짜인 이론이나 신학적 틀이라 할지라도, 공감 없는 위로는 오히려 상처를 깊게 하고 고립감을 더할 뿐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시작되며, 설명이 아닌 함께 있음으로 표현됩니다.
(V) 거룩한 탄식의 권리: 하나님께 진실을 말하다
욥의 이야기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품게 되는 솔직한 감정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너무나 크고 부당하다고 느끼며, 거침없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따져 묻습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욥기 7:11). 심지어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욥기 7:12) 라고 외치며, 자신을 옭아매는 듯한 하나님의 감시(?)에 항변합니다. 이는 단순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발 자신을 좀 내버려 달라는 처절한 외침입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은 표면적으로 불경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솔직한 탄식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정직함의 표현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아름다운 말로만 기도하는 것은 진실한 기도가 아닙니다. 마치 의사 앞에서 자신의 아픈 곳을 숨기고 "알아맞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상처와 분노, 의심과 절망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누군가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하나님, 저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해서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그에게 평강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대신, "하나님, 너무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어떻게 저에게 그럴 수 있나요? 차라리 그가 넘어져서 무릎이라도 깨졌으면 좋겠어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후자의 기도가 당장은 거칠고 유치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진심을 정직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하나님과의 진실한 소통에 더 가깝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마음을 쏟아낸 후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받으시고, 위로와 함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욥의 탄식은 믿음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며, 역설적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을 향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관계는 꾸며낸 경건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정직함 위에서 세워집니다.
(VI) 황무지에서 의미를 향한 씨름
욥의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 물질적 상실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가 의미를 잃어버린 듯한 깊은 실존적 공허함과 씨름합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욥기 7:7). 한때 소중하고 의미있게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한낱 바람처럼 덧없이 느껴질 때, 인간은 가장 큰 절망에 빠집니다. 사람은 밥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삽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 삶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힙니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경험은 이 의미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막에 불시착한 그는 구조될 가망이 희박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입니다. 마실 물도 거의 없고, 구조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그는 문득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떠올립니다. '진정으로 조난당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기다리는 그들이다.' 이 깨달음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한 생존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책임감과 연결된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의미는 그에게 극한의 상황을 견뎌낼 힘을 줍니다.
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평생 신실하게 지켜왔던 삶의 방식, 즉 의롭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의 체계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제 그는 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하는 힘겨운 과제 앞에 놓였습니다. 그의 불평과 탄식은 단순히 고통에 대한 반응을 넘어, 이 의미의 부재에 대한 처절한 항변이기도 합니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혼돈과 씨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이야기처럼,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관계와 책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VII) 판단을 넘어: 연민의 변화시키는 힘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은 세상을 명확한 기준에 따라 나누고 판단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종종 한쪽은 우월하고 다른 한쪽은 열등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며, 세상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의 고통을 은연중에 죄의 결과로 해석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판단의 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의 세계관 속에서는 진정한 평화를 찾기 어렵습니다. '틀렸다'고 규정된 이들의 아픔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리의 벽을 허물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이라는 잣대가 아니라 '자비'(자비)라는 잣대였습니다. 자비는 따뜻하고 자유로운 마음(자, 慈)으로 타인의 슬픔(비, 悲)을 나의 슬픔처럼 느끼는 마음입니다. 영어의 '컴패션'(Compassion) 역시 '함께'(com) '아파한다'(passion)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판단하고 나누는 대신,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소외되고 죄인이라 낙인찍힌 이들을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함과 속됨, 의인과 죄인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허물고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욥의 고통은 바로 이 자비를 갈망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이 자신을 판단의 잣대로 재단하는 대신, 자신의 아픔에 깊이 공감해주기를 바랐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욥 자신도 고통을 겪기 전에는 어쩌면 엘리바스와 비슷한 판단의 틀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고 나니, 기존의 흑백논리나 상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고통은 때로 우리를 완고한 판단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여, 타인의 아픔에 눈뜨게 하고 연민의 마음을 배우게 하는 역설적인 교사가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치유와 화해는 서로를 가르는 날카로운 판단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연민 속에서 시작됩니다.
(VIII) 관점을 찾아서: 어렵게 얻은 거리의 선물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고통의 경험이 성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성찰적 거리'(성찰적 거리)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먼저, 고통(고난)의 현실을 직면합니다. 그리고 이 고통 속에서 의미(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의미는 깊은 자기 성찰(성찰)을 통해 찾아지는데, 이 성찰은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자신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심리적, 영적 공간, 즉 '거리'(거리)를 확보할 때 가능해집니다. 이 거리를 통해 얻어진 성찰이 우리를 비로소 성숙(성숙)으로 이끕니다.
문제는 극심한 고통의 한가운데서는 이러한 성찰적 거리를 확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욥이 처음에 친구들의 위로나 신학적 설명에 귀 기울일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지금 내가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내 고통을 떨어져 볼 수가 없어요. 성찰적 거리가 확보가 안 됐어요." 그의 외침은 고통의 즉각성과 압도성이 어떻게 성찰의 가능성을 앗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욥기 7장 말미에 이르러, 욥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모든 불평과 원망을 쏟아낸 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욥기 7:21). 여전히 고통 속에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남김없이 토로하는 과정을 통해 아주 작은 '마음의 여백'이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작은 틈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어렴풋이나마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엘리바스가 지적했던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罪性)을 다른 차원에서 수용하게 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깨달음이 외부의 강요나 설득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내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점입니다. 고통을 통한 성숙은 즉각적인 결과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과 정직한 씨름, 그리고 성찰을 위한 거리 확보라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어렵게 얻어지는 선물과 같습니다.
(IX) 결론: 내 안의 광야를 품다
욥의 여정은 우리 각자가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고통과 외로움, 신앙의 질문들을 깊이 있게 탐색하도록 이끕니다. 우리는 일상의 버거움에서 시작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와 그것이 가져오는 깊은 고립감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홀로 있음'이라는 상태가 절망적인 '외로움'일 수도 있지만, 성찰과 성장을 위한 '고독'의 공간이 될 수도 있음을 배웠습니다. 섣부른 판단과 차가운 신학이 아닌, 함께 아파하는 '공감'의 중요성을 확인했으며, 하나님 앞에서조차 솔직한 감정을 토로하는 '탄식'이 깊은 관계의 일부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절망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끈질긴 노력을 보았고, 판단 대신 '연민'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열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통을 통해 성숙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찰적 거리'를 확보하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고통과 신앙의 여정이 결코 단순하거나 직선적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친구들과 갈등하며,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혼란과 질문 앞에서 정직하게 머무르는 용기입니다. "너무 쉽게 답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항상 물음 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처럼, 우리는 때로 답 없는 질문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쾌한 해답보다는, 곁에서 함께 아파하며 손잡아주는 따뜻한 인간적 연대입니다.
"자기 속에 사막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참 깊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안의 고통과 외로움,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바로 그 '사막'일지도 모릅니다. 그 내면의 황량한 풍경을 외면하거나 도망치려 하기보다, 그곳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거닐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 깊은 지혜와 성숙,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사막을 통과하며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여정 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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