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시편55:6-7
I. 서론: 훨훨 날아가고픈 마음
A. 삶의 무게와 도피의 갈망
때때로 우리는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작품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듯, 지금 발 딛고 선 힘겨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삶의 무게가 감당하기 어렵게 느껴질 때, 마치 날개가 있어 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훨훨 날아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펼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시편 55편은 바로 이러한 인간 존재의 깊은 고뇌와 간절한 소망을 절절하게 담아낸 노래입니다. 이 시는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과 울림을 전하며, 상처 입은 마음의 처절한 절규이자 동시에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희망의 속삭임으로 다가옵니다.
시편 55편의 표제는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스길'(מַשְׂכִּיל)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교훈' 또는 '지혜로운 묵상시'를 의미합니다. 이는 시편 55편이 단순한 감정의 토로를 넘어, 우리에게 깊은 영적 통찰과 삶의 지혜를 제공하고자 함을 시사합니다. 특히 이 시편이 극심한 개인적 고통과 배신의 경험으로부터 탄생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마스길'이라는 표제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평온한 상태에서의 사색뿐 아니라, 인간이 겪는 가장 격렬한 고통의 도가니 속에서야말로 때때로 가장 심오한 지혜와 교훈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시편 55편은 고통스러운 영적, 정서적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자체로 하나의 교훈이 되는 셈입니다.
B. 다윗의 노래, 우리의 노래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는 이 시편을 다윗의 작품으로 간주하며, 특히 그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가장 신뢰했던 측근 아히도펠의 배신이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며 이 시를 썼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시편에 담긴 감정의 깊이와 절박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시편 55편은 다윗 한 사람의 특수한 경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깊은 절망과 배신감에 몸부림치면서도 그 암흑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희미한 희망의 빛을 놓지 않으려는 모든 이들의 보편적인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II. 절망의 한가운데서: 시인의 부르짖음 (시편 55:1-5)
A. 하나님, 숨지 마소서 (1-2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시 55:1)라는 절박하고도 간절한 외침으로 그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첫마디에는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을 외면하고 어디론가 숨어버리신 것처럼 느끼는 시인의 깊은 절망감과 고독감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이어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즉각적인 관심과 반응을 갈망합니다.
저명한 구약학자 **브루스 월키(Bruce K. Waltke)**는 이러한 시인의 절규가 단순히 위기 상황에서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자체를 갈망하는 영혼의 몸부림이라고 설명합니다. 죄악이나 인간적인 고통은 때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처럼 느껴지게 만들 수 있지만, 시인은 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고 그분의 임재와 응답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 부모의 얼굴과 따뜻한 시선을 필사적으로 찾는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침묵이나 외면이 아닌, 그분의 인격적인 응답을 통해 관계의 회복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시 55:2)라는 구절은 그의 내면이 얼마나 극심한 불안과 고통으로 요동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평안을 잃고 잠 못 이루며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B.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3절)
시인의 고통은 단지 내면적인 괴로움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을 지목하며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시 55:3)라고 외칩니다. 여기서 "죄악을 내게 더하며"라는 표현,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야미투 알라이 아웬'(יָמִיטוּ עָלַי אָוֶן)이라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나쁜 일을 저지르다'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표현이 고대 근동 사회에서 말이 지녔던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 즉 저주나 악의적인 비방이 실제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존 골딩게이(John Goldingay) 교수는 그의 시편 주석에서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통해 시인이 겪고 있는 위협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악의에 찬 말이나 저주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실제적인 불행과 고통을 '쏟아붓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원수들은 이러한 언어적 폭력을 통해 시인에게 끊임없이 고통과 불행을 퍼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난이나 험담을 넘어, 시인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고 그의 명예와 사회적 기반을 파괴하려는 악의적인 공격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대 명예-수치 문화권에서 이러한 공개적인 비방과 저주는 개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시인이 느끼는 압박감은 바로 이러한, 말로써 가해지는 무형의 폭력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C. 죽음의 공포가 나를 덮치네 (4-5절)
원수들의 끊임없는 악담과 실제적인 핍박은 결국 시인의 마음을 깊이 병들게 하여, 그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시 55:4-5)라고 처절하게 탄식합니다. 그의 고통은 단순한 슬픔이나 불안을 넘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격렬한 아픔(chul이라는 히브리어는 극심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으로 나타나며, 마치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자신을 엄습하여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극심한 공포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막연한 불안감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실존적인 공포이며, 그의 영혼이 극한의 상태에 내몰렸음을 보여줍니다.
III.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현실 도피의 갈망 (시편 55:6-8)
A. 광야로, 폭풍을 피하여 (6-8절)
마치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듯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시인은 애끓는 심정으로 외칩니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 55:6-8).
성경에서 비둘기는 종종 순결, 평화, 또는 연약함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0:16 참조). 시인은 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마치 연약하지만 자유로운 비둘기처럼 날개를 달고 아무도 없는 멀리 광야로 날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뒤흔드는 삶의 폭풍과 광풍을 피하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지식인이 겪었던 무력감과 절망을 그린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주인공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자꾸나."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모습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에 직면할 때 인간은 종종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꿈꾸지만, 이는 동시에 안전하고 평화로운 피난처, 영혼의 진정한 안식을 향한 깊은 갈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B. 영혼의 둥지를 찾아서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그의 저명한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둥지'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의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역설했습니다. 바슐라르에게 둥지는 단순한 물리적 구조물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보호받고, 안정을 누리며,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편안함을 느끼고 꿈을 꿀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를 상징합니다. 에 따르면, 둥지는 "원초적 피난처"이며, 그 안에서 존재는 "몸을 웅크리고, 숨고, 아늑하게 누워 숨겨지는" 경험을 합니다. 또한 둥지는 "거주 기능의 자연스러운 서식지"이며, 우리가 본능적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공간입니다.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는 '광야'는 바로 이러한 바슐라르적 의미에서의 영적인 '둥지'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소란과 위협, 배신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깊은 보호하심 아래 거할 수 있는 평화로운 피난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꿈꾸는 광야는 텅 빈 불모지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거짓과 폭력으로부터 정화된 공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영혼의 궁극적인 쉼터이자 재충전의 장소인 셈입니다. 이처럼 현실 도피의 갈망은 역설적으로 가장 깊은 안전과 평화에 대한 갈망과 연결됩니다.
IV. 가장 깊은 상처: 친구의 배신 (시편 55:12-14, 20-21)
A. "그것이 너였다니!" (12-14절)
그러나 시인을 더욱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것은, 그를 이토록 괴롭히는 원수가 다름 아닌 한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라는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시 55:12-14).
이 얼마나 처절하고 가슴 미어지는 탄식입니까! 원문 뉘앙스를 살려 "그게 너였다니!"라고 외치는 듯한 이 구절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실망감과 배신감이 사무쳐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적의 공격은 고통스럽지만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믿고 의지했던 친구,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나누었던 동료, 심지어 "하나님의 집 안에서" 함께 예배하며 영적인 교제를 나누었던 '가까운 친우'(ye˘dıˆdıˆ, '나의 사랑하는 친구'라는 의미를 내포)의 배신은 그 어떤 고통보다도 깊고 치명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가까운 이로부터의 배신은 단순한 외부적 공격을 넘어 "자아의 파괴"를 야기할 수 있는 극심한 정서적 충격을 준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의 경험은 바로 이러한 자아의 붕괴에 직면한 고통을 반영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집을 드나들며 신앙의 여정을 공유했던 사람이며 , 가장 깊은 신뢰를 보냈던 그 친구가 이제는 날카로운 칼을 겨누고 서 있을 때, 시인이 느꼈을 충격과 아픔, 그리고 인간적 신뢰의 근본적인 파괴는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B. 역사적 배경: 압살롬과 아히도벨
유대 전통과 많은 성서학자는 이 시편의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다윗 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한때 가장 신뢰했던 책사이자 친구였던 아히도펠의 배신을 겪었을 때의 참담한 심정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사무엘하 15-18장 참조). 아히도펠은 다윗에게 "가까운 친우"였으며 그의 조언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질 정도로 지혜로웠으나,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하여 다윗을 대적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배신, 특히 영적인 교제까지 나누었던 동반자의 배신은 시편 전체에 흐르는 고통의 강도를 극적으로 심화시킨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배신은 단순한 정치적 이반을 넘어, 인간관계의 가장 신성한 영역까지 침범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C. 버터같이 매끄러운 말, 그러나 마음에 품은 전쟁 (20-21절)
시인은 배신한 친구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묘사합니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시 55:21, 새번역 참조). 겉으로는 버터나 기름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말, 듣기 좋은 아첨과 친밀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전쟁과 같은 적의를 품고 있으며, 그의 말은 실제로는 상대를 찌르기 위해 뽑아 든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은 배신으로 인한 아픔을 더욱 쓰라리고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믿었던 사람의 따뜻한 말 뒤에 숨겨진 냉혹한 칼날을 발견했을 때, 시인이 느꼈을 혼란과 절망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동반자이자 신뢰했던 친구로부터의 배신은 단순한 적대 행위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신뢰 기반을 뒤흔들고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가장 파괴적인 형태의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V. 혼란에 빠진 도시,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 (시편 55:9-11, 15)
A. 성 안의 강포와 분쟁 (9-11절)
시인의 고통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로 확장됩니다. 그는 자신이 머무는 성, 아마도 예루살렘 안에서 "강포와 분쟁"(9절)이 끊이지 않음을 목도합니다. 악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10-11절)라고 그는 고발합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인 원한이나 피해의식을 넘어, 자신이 사랑하고 속해 있는 공동체, 거룩해야 할 도성 전체에 만연한 불의와 폭력, 부패와 기만에 대한 깊은 슬픔과 분노의 표출입니다.
성경에서 '도시'는 종종 인간 문명의 발전과 성취를 상징하는 동시에, 경쟁, 효율성 지상주의, 그리고 때로는 그 이면에 숨겨진 타락과 부패의 장소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이 도시를 건설했다는 창세기의 기록(창세기 4:17)은 이러한 도시 문명의 양면성을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시인은 자신이 속한 도시가 이처럼 부조리하고 불의한 현실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며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이는 그의 개인적인 고통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B. 저주의 기도, 그 의미는? (15절)
이러한 극심한 고통과 분노 속에서 시인은 악인들을 향해 매우 강렬한 심판의 언어를 쏟아냅니다.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도 있음이로다" (시 55:15). 여기서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 즉 무덤이나 지하세계, 절망적인 종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저주에 가까운 기도는 신약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구약학자 **에릭 젠트리(Eric J. Zenger)**를 비롯한 여러 학자는 시편에 나타나는 이러한 탄원, 소위 '저주시편'(imprecatory psalms)들이 개인적인 복수심의 단순한 표출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외침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에 따르면, 젠트리는 이러한 기도가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거울을 들이대는 시적인 기도"이며, 폭력의 희생자들이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고 기도에 의한 저항을 통해 비폭력적으로 폭력을 견디도록" 돕는다고 봅니다. 더욱이 그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복수를 이양하는 행위 자체가 개인적인 복수를 포기함을 의미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악이 승리하고 정의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시인은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는 대신, 그 모든 분노와 고통, 그리고 최종적인 심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가 임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대신, 그 해결할 수 없는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냄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적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23장 4-5절은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고 명합니다. 이는 원수를 직접적으로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의 실질적인 필요를 도움으로써 적대감을 해소하고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토로함으로써, 그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주권을 인정하는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VI. 전환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55:16-18, 22-23)
A.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드리는 기도 (16-18절)
극심한 고통과 참담한 배신의 아픔 속에서도 시편 기자는 절망의 심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리고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께로 자신의 시선과 마음을 돌립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시 55:16-18).
시인은 끈질기고 꾸준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붙잡으려 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라는 표현은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지속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다니엘 6:10 참조). 이는 단순히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습관적인 기도를 넘어,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갈망하는 그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비록 그의 눈앞에 보이는 원수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그가 자신의 모든 근심과 탄식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놓았을 때, 그의 내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평안"(히브리어 '샬롬', שָׁלוֹם)의 회복입니다.
B. 고통에서 신뢰로의 여정
저명한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교수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시편의 신학(Theology of the Psalms)》에서 시편의 수많은 탄식시가 고통과 절망의 처절한 토로에서 시작하여 점차 찬양과 신뢰의 고백으로 전환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깊은 씨름을 통해 경험하는 실제적인 영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설명합니다. 브루그만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안정된 상태(orientation), 고통으로 인한 혼란 상태(disorientation),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새로운 안정 상태(reorientation)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시편 55편의 기자는 배신과 위협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정직한 탄식과 끈질긴 기도를 통해 점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고 '새로운 안정 상태'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더 이상 원수들의 위협과 악의적인 말들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낮아지게 될 것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19절, 21절 참조). 이러한 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부 상황의 변화보다 선행될 수 있으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시인에게는 가장 큰 힘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C.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22-23절)
마침내 시인은 고통과 혼란의 긴 터널을 지나, 다음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선포에 이르게 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주여 주께서 그들을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5:22-23).
이것이야말로 시편 55편이 우리에게 주는 최종적인 결론이자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 견디기 힘든 고통, 깊은 두려움, 쓰라린 배신감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정직하게 내려놓고 맡길 때, 그분께서 친히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가 세상의 풍파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히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악인들은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가겠지만,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굳게 서게 될 것이라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이처럼 시편 55편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정직한 부르짖음과 기도가 어떻게 영혼을 치유하고 새로운 신뢰와 평안으로 인도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고통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와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VII. 고통의 자리에서 확신의 자리로: 시편 55편과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
A. 우리 삶의 시편 55편
오늘 우리는 시편 55편을 통해, 한 영혼이 겪었던 처절한 고통의 심연과 그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피어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의 여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기치 않은 고난의 폭풍이 몰아치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견디기 힘든 배신의 아픔을 경험하는 순간들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하고 탄식하며, 이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멀리 도피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편 55편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더 나은 길, 더 깊은 차원의 대응 방식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고통과 탄식, 슬픔과 분노, 심지어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원망과 저주의 감정까지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솔직하고 진솔한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이 시편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B. 정직한 기도를 통한 회복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정직한 기도를 통해 우리의 상하고 찢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며,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곧 '샬롬'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그분의 따뜻하고 강력한 음성을 듣게 하시며,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다시 한번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며,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C. 마지막 권면
시편 55편의 말씀을 통해, 현재 각자가 홀로 힘겹게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무거운 짐들, 풀리지 않는 문제들, 깊은 상처들을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인생의 폭풍과 광풍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의지함으로써,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참된 평안과 영적인 자유를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때로는 말 못 할 신음과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소리를 들으시고 가장 선하고 완전한 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시편 55편은 고통과 배신이라는 인간 실존의 어두운 단면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어지는 궁극적인 희망과 회복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고대의 노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한 변함없는 위로와 치유의 안내서가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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